20세기는 그야말로 전격전의 시대라 불릴 만 하다. 전쟁이 나면 모든 국민들이 동원되는 총력전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과거 전쟁처럼 더 이상, 왕족이나 귀족 클럽의 스포츠 리그가 아니다. 모든 국민들의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도 전쟁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하다. 모기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에프킬라 한 병을 다 부어버리는 격이다. 지구상에는 수천 기의 핵폭탄이 실전 배치 중에 있다.
미국이 투하한 원자 폭탄은 제 2차 세계 대전을 종결시켰다. 핵 폭탄이 위력이 센 이유는 핵이 떨어질 때 중심부의 온도가 4000도에 육박하여, 태양의 온도와 맞먹는다. 태양풍의 속도는 태풍의 수백 배이다. 버섯 구름에는 방사능이 많아서 피폭을 당하게 된다.
한국은 일본에 이어서 세계 2위의 피폭 국가이다. 7만 정도의 조선인이 죽임을 당했다. 4만 명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부상자들도 2000명 정도 생존해 있다. 한국 정부의 외면 때문에 한국인들의 사망률이 일본보다 더 높았다. 고통은 이후 2세 3세에게 이어져 심각한 후유증으로 작용하고 있다.
핵무기 개발 역사: 아인슈타인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라늄을 이용 해 다이나마이트 보다 수만 배 강한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동료 과학자들이 밝혀 냈으니 나치보다 하루 속히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영국 수상 처칠의 설득으로 미국 대통령이 응해 맨하탄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당시 미국 부통령 트루먼이 모를 정도로 극비로 수행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급사하는 바람에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비로서 그는 알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부통령이 몰랐던 사실을 소련의 스탈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1942년에 시작해서 3년 후에 만들어내게 된다. 잔학한 히틀러보다 빨리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히틀러의 손에 들어가면 인류의 전멸을 가져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무서운 사명감으로 분출 된다. 결국 두 개의 핵폭탄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우라늄, 또 하나는 플루토늄 폭탄이었다. 뉴멕시코 사막에서 인류최초로 핵 실험을 한다. 당시 추정한 폭발력보다 압도적인 수치의 결과가 나와서 과학자들이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많은 과학자들은 극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히틀러가 자살 했을 때 핵 패기를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은 강행했고, 히로시마 투하를 결정했을 때 과학자들의 반란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은 히로시마가 당했을 때 바로 항복하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의 엄청난 폭격에 이미 적응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원폭의 심각성을 바로 느끼지 못한 상황이었다. 원폭을 당했을 때 종전을 위해서 최고위원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종전을 위해 최고위원회 소집했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8월 9일 새벽 그 날 소련이 참전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히로히토가 종전 방안을 찾아보라 지시했지만 나가사키 원폭이 또다시 발생하게 된다. 결국 일본은 무조건 항복한다.
소련의 입장: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 스탈린은 냉소적인 반응을 했다고 한다. 자신들도 만들고 있음을 미국 대사에게 은근히 암시했다. 소련도 결국 1949년 8월 달에 핵 실험을 성공시킨다. 이로 인해 냉전이 시작되게 된다. 1945년에 작가 조지 웰은 두 거대한 괴물의 출현으로 평화도 전쟁도 없는 냉전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측을 했고 그로 인해 Cold War(냉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게 된다. 미국의 핵 독점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고 최초의 핵 전쟁 즉 한국 전쟁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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