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세계사 편력

고대 이집트와 근대 이후의 이집트 역사

안개 속 구름 2014. 10. 24. 13:11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로 흔히 불린다.  나일강이 없으면 이집트는 없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이집트는 고대에 두 개의 이집트로 나눈다.  하 이집트와 상 이집트였다.

고대 나일강 이집트 왕국은 두 이집트를 통일 한 것이다.

메네스 왕이 처음으로 이집트를 통일해서 최초로 파라오가 되었다.   피라미드는 조세르 왕부터 세워지게 되었다. 

 

피라미드의 필요성: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지상을 통치 했던 왕 오시리스가 동생에 의해 암살당하고 아내이자 여동생인 이시스의 몸을 통해 아들로 환생했다고 한다. 그가 호루스이다. 호루스는 나중에 동생에게 복수하고 왕이 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후세계에 가서 왕이 되고 아들은 현세를 지배하게 되었다.  지상의 왕은 호루스의 화신이 되고 사후 세계의 왕은 오시리스의 화신이 됐다.  이건 그들의 영혼 불멸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완벽히 보존 하기 위해 미라를 만들었다.  내세에서도 써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피라미드들은 많이 도굴이 된 상태다. 하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은 20세기에 발견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통치 이후 이집트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민족 왕조였다. 이때 이집트는 동서양의 가교가 되어 여러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최대의 도서관이었다.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고 왕의 정책 자문을 주는 기관으로써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7세 이후 이집트는 로마 황제의 사유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멸망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로마 제국이 멸망 한 이후에는 동로마 비잔틴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후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됐다.   639 12월에 이슬람의 지배에 들어 가게 된다.  이집트의 언어가 아랍어로 바뀌게 되고 그들의 종교가 이슬람교로 변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이 함락 되었을 때 다시 재탈환한 살라딘과 이집트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 했다. 

 

 13세기 무렵에 이집트 맘루크 왕조는 이스라엘에서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막강한 기동력을 자랑하는 몽골군을 상대로 해서 자연 지형을 잘 활용하여 몽골군을 거의 전멸 시켰다. 몽골이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곳이 맘루크 왕조였다. 이로 인해 이집트 카이로가 이슬람 세계의 중심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하지만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게 되어 패하게 되고 다시 중동으로 이슬람 중심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오스만 터키의 지배가 오래 지속된다.

 

 이집트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공격을 현대 역사의 시발점으로 생각한다.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기간을 이집트 역사의 암흑기로 생각한다.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에게 아랍어 대신 터키어를 강요했기 때문에 아랍 문화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던 중 1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 곳곳에서 충돌하면서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프랑스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이집트를 공격해서 영국의 해상 독점을 약화 시키려 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이집트 침공이 아랍문학의 부흥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구문화에 대한 충격, 급속한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이집트 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각을 심어주었다.  사회주의 사상이 이집트로 유입되게 되며, 아랍문화의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프랑스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공격만 하고 정복하지는 않고 떠났다.  그때 프랑스는 이집트의 로제타스톤 및 오벨리스크를 가지고 갔다.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아랍민족주의가 생겨나게 되고 새로운 민족주의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1801년에 프랑스가 떠나고, 곧바로 민중 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1805년에 근대 이집트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함마드 알리가 공식적으로 총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는 전반적인 이집트 개혁을 실시하는데, 서구식 군사 제도 및 정치 경제 문화교육에 대대적인 수술을 가하여 이집트를 서양식 근대 국가로 탈바꿈 시킨다.  토지와 조세 개혁, 유럽식 교육을 전면적으로 도입한다.  

 개혁을 통한 국력 신장은 주변국으로의 영토확장에 나서는 자신감을 주게 된다.  시리아와 수단을 공격하게 되면서 영토 확장에 나서자 유럽은 이를 좌시하지 않고 1840년에 영국과 오스트리아 연합 함대가 시리아를 점령하게 되고 1841년에 영국 주도로써 협정이 체결되는데 이때 무함마드에게 수단 이외 모든 곳에서 군대를 철수하라는 요구를 한다. 또한 당시 이집트 병력이 약 10만 이었는데 병력을 18000명으로 줄이게 했고, 오스만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추가 한다.  하지만 반발하는 무함마드 알리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서 이집트에 대한 세습권을 그에게 부여해주었다. 그래서 1952년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 될 때까지 무함마드 후손이 세습을 하게 되었다.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증폭된 사건은 수에즈 운하 사건이다. 1869 11 17일 개통이 된 수에즈 운하는 유럽과 아시아를 직접 해상로로 연결해 주었다.  하지만 이 운하 건설로 인해 이집트는 국가 재정이 고갈된다. 그래서 영국이 1875년에 운하를 장악하게 되고 이집트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한다. 1879년에 민족주의 세력이 의회를 장악하고 민족주의 정부를 수립했는데 영국은 무력으로 그들을 해산 시킨다.  이어서 수단에서는 종교 운동이 일어난다. 1881년에 지하드를 선포하고 영국에 저항한다.  결국 영국은 이집트를 공식 독립국가로 인정하게 되는데 그 때가 1922 2 28일이다.  이집트에 대한 보호령을 공식 폐지하고 독립국가임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를 선언하자, 그 다음날 아랍국가 6개 나라가 1차 중동 전쟁에 참여하는데,  패배하였다.  이들은 부패한 왕정에 패인을 두었고, 새로운 개혁운동에 대한 필요성이 여론화 시킨다.  이를 기점으로 군사 정권이 중동 곳곳에 일어나게 되는데, 이집트가 가장 먼저 시작을 한다. 1952 7 23일 낫세르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집트 왕을 해외로 추방시킨다.  1954년부터 서서히 정권을 장악한 낫세르는 1956년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제  낫세르를 중심으로 이집트가 재편된다.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자 또 다른 2차 중동 전쟁 또는 수에즈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와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세계 여론은 서구 편이 아니었고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게 되자 그들은 다시 점령지에서 돌아가게 된다.  낫세르는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 외교적으로 승리하면서 수에즈 운하를 되찾게 된 것이다.

 낫세르 이후 집권한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세계의 환영을 받았지만 팔레스타인에게는 배신자 취급을 받게 된다.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이집트가 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최초로 중동 국가 중 처음으로 이집트는 적국인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친미 , 친이스라엘로 돌아서게 된다.  아랍 세계는 반발하게 되었고, 아랍연맹에서 이집트를 제명 시킨다.   물론 지금은 다시 회원국이 되었다.  하지만 제명 사건은 이집트 내부에서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1981 10 6일에 무슬림 형제단의 저격을 받고 사다트는 암살 당하고 만다.  그리고 무바라크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이 저격 사건을 빌미로 무려 30년 내내 비상 계엄령을 실시한다.  집권 30년 만인 2011년에 결국 시민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 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 선출되게 된다.



 

 고대부터 현대 까지 이집트의 역사를 쭉 살펴 보았다.. 정말 무모한 작업이었다. 5000년의 역사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개괄적으로 쓰는 것도 이토록 손이 아플 지경인데,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