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실록/ 홍경래/ 세조 정치/김조순/효명세자
이때 만큼 조선시대에 변화가 빠른 시기는 없었다. 이앙법, 화폐구조가 발달했으며, 정조시대에 이미 서얼에게 관직을 개방했고 심지어 규장각에는 서얼 출신들을 대거 채우게 된다. 금난 전권의 붕괴로 시장경제가 활성화 되었으며, 노비가 대거 해방되었으며, 신분 해체가 가속화 된다. 중인과 상인이 급격히 늘어 신분을 사고 파는 거래가 활성화 되는데 이때 김씨 이씨 성이 급격히 늘어난다. 사실 현재 김씨 이씨 중에 순혈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이다.
물론 이일은 갑오개혁때 모든 사람들이 성을 갖게 되자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세도 정치의 출현으로 인해 공명첩 즉 이름이 명기 되지 않은 벼슬 증명서를 사고 파는데 부패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 했고 사회의 불안 요소로 크게 작용한다.
이때 터진 사건이 그 유명한 홍경래의 난이다.
민란의 조짐은 이미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순조11년 12월 20일 평안 감사로부터 급보가 온다. 난이 터진 것이다. 홍경래는 평안도 영광 잔반 출신 곧 몰락한 양반 출신이었다. 스스로 평서 대원수로 지칭하며 홍경래의 난을 진수 한다.
그리고 곧바로 주면 8개 고을을 무혈입성하며 함락시킨다. 이때 서천 부사 김익수가 바로 항복하는데 이가 바로 그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의 조부이다.
홍경래의 반군은 결국 관군과 교전하다 패퇴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인다. 관군은 땅굴을 파고 폭파 시켜 성문을 열고 함락시킨다. 4개월간의 정주성은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하였는데 치안은 비교적 괜찮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된 사회적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세도 정치로 들어간 시대, 정부가 백성을 돌보지 않은 상황, 성리학 논리의 강화, 등등 개혁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상황에서 천대 받던 천민들이 스스로 자치하며 치안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마음속에는 정감록 사상, 난세의 예언, 천주교, 신 앞에 평등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 그들의 반란은 단지 이후 사회 곳곳에서 터지는 불만의 시작일 뿐이었다. 대표적으로 이후 1862년 발생하는 진주 민란이 있다. 이 난은 동학농민 운동의 서막이 되었다.
그럼 이 때의 임금 순조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순조는 강단있고 똑똑하고 부지런한 군주였다. 다만 시대적 한계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정순대비와 순조의 정책이 차이가 없었다. 아버지 정조의 유훈인 사도세자의 추존 역시 추진하지 못하게 된다. 전략적 구상이 없었던 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론 시파가 벽파를 몰아냈다. 하지만 벽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벽파의 역공을 피하는게 급선무였다.
홍경래의 난이라는 홍역을 겪은 뒤에도 순조 임금은 별로 고민하는 흔적을 찾아 보기 어렵다.
세도 정치의 큰 특징은 의정부의 기능이 약화되고 비상대책 기구인 비변사가 큰 힘을 발휘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도가의 척신들이 비변사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게 된다. 이제 임금은 굵직한 정책은 비변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민생이나 돌보는 한직을 자처한다. 순조는 암행어사나 파견하며 민정을 살피는 일을 할 뿐 큰 정책은 소극적인 태도를 나타내게 된다.
비변사는 말 그대로 변에 대비하는 기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태는 비정상적 국정 운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순조가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회심의 반격을 할 기회가 찾아온다. 그의 아들 효명세자의 출현이다.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19살에 대리청정을 한 세자는 매우 총명했으며 정치를 잘했다. 세도가와 백중지세를 이룰 수 있게 된것이다. 순조는 사실상 그에게 전권을 맡겼는데 일찍이 효명세자처럼 정승 임명권을 행사한 대리청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효명 세자는 조만영의 딸과 혼인한다 . 그리고 22살 갑작스런 각혈로 사망한다.
효명 세자의 업적으로는 , 궁중 악을 창제하였으며, 아버지 순조를 위해 창덕궁 후원쪽에 99칸 민가 집을 지어주었으며, 그의 지휘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경을 그린 동궐도가 생겨나게된다. 그의 국정에 대한 장악력, 서자 출신의 적극적인 등용은 한줄기 조선의 희망이었다. 효명세자의 죽음은 순조에게 비통한 일이었다. 순조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제문을 직접 지었다. 이제 정국 수습은 고스란히 순조의 몫이 되어버린다. 효명세자는 이후 익종으로 추존된다. 고종황제는 그를 문종 황제로 추존하기까지 한다.
순조는 45세에 승하한다. 정약용이 부름을 받고 의술을 펼치기 위해 달려 오고 있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은 세도가의 주도권 장악 국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일찍이 태종이 가장 경계 했던 상황이 조선의 종국이 되고 만것이다.
국제 상황도 좋지 못했다. 일본은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개항하였고 중국은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모든 피해가 백성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가장 낙후한 정치 형태를 맞이하게 된다.
삼정문란, 매관 매직, 온갖 부패는 막을 길이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