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세계사 편력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반목과 갈등의 역사 -1부

안개 속 구름 2014. 8. 29. 23:12

이라크의 현재 상황은 매우 혼란스럽다.  최근에 수니파 무장 단체(ISIL)인 이슬람 국가가 바그다드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크게 중동 지역이 종교 세력으로 보면 이란이 시아파가 많고 나머지는 수니파가 많은 상황이다.  이라크 역시 인구상 대부분 시아파지만 소수의 수니파가 사담 후세인 정권까지 정국을 주도했었다.  소수의 수니파가 다수의 시아파에게 위축 되지 않고 폭거를 일으킨 것도 이 때문이다.  원래 시아파는 억압받던 세력이었지만 후세인 정권이 붕괴 되면서 다수인 시아파가 정권을 쥐게 되었다. 수니파가 이에 대해 반격을 가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지 출처:dailywrn)

 두 종파 간 피와 보복의 역사: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시기는 7세기 이다.  6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과 사산왕조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터지게 된다.  이로 인해 동서 교역로가 막히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상인들은 새로운 무역 루트를 찾게 되고 아라비아 반도를 통해 지중해로 가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다.  바로 메카는 이 부분에 있었고, 국제적인 무역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570년에 무함마드가 이곳 메카에서 태어난다.  610 9 27일 밤에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슬람교를 창시한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라고 했다.  처음에는 세가 무척 약했지만 하층민을 대상으로 포교를 하면서 점차 세가 확장 되자 당시 메카 귀족층들이 화답하게 되면서 결국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하게 된다.  이를 '헤지라' 라고 부르게 된다. 이슬람의 원년이 되는 해가 바로 이때이다.  무함마드는 고아로 자랐다.  생활이 매우 힘들었다  25세 때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한다.  생활이 안정되고 명상과 사색을 통해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이다.  그가 죽자 마자 시아파와 수니파가 생기게 된다.   이 양파가 갈등하는 배경이 된 것은 무함마드가 수립한  이슬람 공동체(움마)로 인한 문제이다.  '움마'는 이슬람이 국가의 모델로 삼은 공동체이다.   하지만 만일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게 된다면 정통성이 개인에게 갈 것인가 아니면 국가로 갈 것인가가 논쟁거리가 된다.  시아파는 개인에게 간다고 보며 반면에 수니파는 집단에게 간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교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이슬람교는 육신오행의 종교라고 부른다. 여섯 가지 믿음과 다섯 가지의 실천이다.  다섯 가지 실천이란 '신앙 고백' '예배' '단식' '종교세' '순례'이다.  시아파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 시킨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성전을 의미하는 '지하드'이다.  시아파는 정의를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지하드를 의무사항으로 규정한다.

 



 (이미지 출처:wikipedia)

 이슬람교 내부에 분파가 싹트게 된 직접적인 원인: 간단히 말해서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사건이 계기가 된다.  632 3 16일에 예언자 무함마드가 추종자들과 함께 마지막 순례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규모 집회를 연다. 이 회의에서 옆에 있는 알리의 손을 잡고 연설을 했는데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위였다.  "나를 마훌라로 맞이하는 자는 알리를 마훌라로 맞이하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훌라'란 주인 또는 친구라는 뜻이다.  시아파는 마흘라를 '주인'으로 규정한다 즉 후계자로 선언한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에 수니파는 단순히 친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후 칼리프 제도가 수립이 되는데 3대 칼리프 오스만이 암살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4대 칼리프로 알리가 추대 된다.  오스만 죽음에 대해서 다양한 의혹이 제기된다.  알리는 이 의혹을 수사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그를 반대하는 내란이 두 차례 발발하게 된다.  그리고 양측은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내란은 종결된다.  하지만 661년에 알리가 암살 당하게 되자 우마이야가 새로운 왕조를 새우게 되는데 이것이 우마이야 왕조이다.  '시아'라는 명칭의 의미는 무리 즉 당파라는 뜻이다.  알리의 가문에게 칼리프를 돌려준다는 운동에서 시아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알리의 둘째 아들이 3대 이맘이 되는 데 반란을 일으키다 처참히 살해 된다. 그의 죽음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죄책감과 복수와 정의를 주장하는 회선이 나오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알리를 추종하는 세력이 결합하게 되고, 오늘날 까지 3대 이맘 후세인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이 시점에 이라크가 시아파들에게 일종의 성지가 된 것이다.  많은 시아파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란으로 도피하였다. 많은 시아파들이 이란에 모이게 된다.  이란의 호메이니는 이라크에서 1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슬람 혁명이 발발하자 이라크에 있는 시아파들이 크게 고무되면서 사담 후세인에게 반란을 꾀하게 된다.  이로 인해서 이란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많은 시아파 신자들은 이라크 남쪽에 많이 모이게 된다.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

 시아파 신자가 늘어나게 된 배경:우마이야 왕조는 수도를 메카에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옮긴다.  거기에서 아랍인 우대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아랍인에게는 수입의 40분의 1만 종교세로 부과하고 어떠한 세금도 걷지 않는다.  당시 이슬람교로 개종한 비아랍인들이 이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시아파 운동이 크게 성장하게 된다.  무함마드 가문에게 칼리프 지위를 돌려주자는 운동을 벌이며 시아파와 비아랍인들이 연계되어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 압바스 왕조 또는 아바스 왕조를 세우게 된다.  현재 중동의 국경선은 2차 대전 이후 강대국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현재 여러 가지 갈등이 터지고 있다.  종교란 국경 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