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 청일 전쟁 이후의 조선정국 변화, 을미사변
평양성에서 압승을 거둔 일본은 이제 새로운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통해 고종에게 접근한다. 고종에게 20개조의 개혁안을 제시한다. 그는 왕실사무와 국가사무 간 구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정치를 책임질 내각의 구성을 추진한다. 당연히 내각은 친일 인사로 채워지게 된다. 김홍집, 박영효와 같은 인물로 구성된 친일 내각이 구성되면서 일본의 영향이 커지게 된다.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이다. 그래서 고종은 그를 어느 정도 별개의 대우를 해준다. 그리고 같은 개화파이지만 박영효와 김옥균의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것도 김옥균을 역적으로 아는 고종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표면상 고종의 제안으로 홍범14조가 발표 된다. 기본 방향은 갑신정변에서 제시한 내용과 유사했다. 왕실 재정을 예산에 따라 운영하고, 민법과 형법을 엄격히 집행하는 근대 국가의 법치 질서를 내세웠다.
이후 이준형을 왕으로 삼으려는 역모를 진압하면서 박영효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다.
하지만 후에 훈련대 강화를 주장하자 왕실과 일본 공사의 배척을 받고 일본으로 망명을 가게 된다. 왕실로부터 저의를 의심 받게 되었고,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주관적인 판단으로 정책을 집행했던 것이 실각의 이유였다. 그리고 총리 대신으로 김홍집이 집권하게 된다.
청과 일본의 조약: 이홍장이 시모노세키에 청나라 대표로 가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는다. 청은 일본에 2억 냥의 배상을 지불하고, 대만과 , 펑후, 랴오둥 반도를 일본에 할양 한다. 하지만 러시아가 일본의 중국 주도권을 견제하고자 삼국 간섭을 일으켜 결국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게 만든다.
이 일로 인해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에 주목하게 된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정치감각에 당혹하게 되고 훗날 명성황후 시해를 도모하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된다.
(이미치출처: thehc9.canxan.com)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미우라가 새로 공사로 부임할 때 전임 공사 이노우에와 일종의 모략을 꾸미게 된다. 두 사람이 2주 동안 함께 머물며 많은 상의를 한 정황이 포착된다. 미우라는 군인 출신이었지만 외교에 문외한 이었다. 그를 공사로 추천한 사람은 이노우에였다. 그 둘은 조선의 정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을 의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신보(일본의 관제 신문사)도 모략에 가담하게 되고 시해에 직접 가담할 낭인들을 모집한다. 일본 측의 작전 명은 '여우 사냥'이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내세워 시해 현장에 나타난다. 조선 조정이 직접 훈련대를 해산 시키는 날을 시해 사건을 거행할 날로 정한다. 해산에 불만을 품은 훈련대의 반란으로 조작하기 위함이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구했던 홍계훈이 이때 훈련대 대장이었다. 그는 명성황후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즉사한다. 건청궁에 있는 옥호루에서 명성황후가 피신을 하다가 변을 당하게 된다.
미우라 공사가 입궐해서 새로운 내각을 단행한다. 그전에 있었던 친러 세력을 숙청하기 위함이었다. 일본 정부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사건임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일본은 끝까지 대원군이 주도한 일임을 주장하였지만, 외국 공관 직원들이 목격했기 때문에 의혹을 사게 된다. 왕비가 시해되고 며칠 동안 고종은 시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유길준 내각: 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국비 유학생이었다.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외국 사정에 밝았고 총명했다. 을미 사변에 그는 내각의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며 을미개혁을 주도한다. 을미개혁 이후로 양력을 쓰게 되며, 종두법이 시행된다. 훈련대 대신에 친위대, 진위대를 설치하고, 연호를 건양으로 정한다. 단발령이 시행된다. 유길준이 직접 세자의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한다. 왕비의 죽음을 50일이 지나서야 공식화 한다.
춘생문 사건(국왕탈취사건): 건청궁에 있는 고종은 거의 포위 상태에 놓여 있었다. 친러 세력과 외국 선교인들은 고종을 도와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고종을 탈출 시키려는 작전을 세우게 된다. 고종이 춘생문을 통해 담을 넘어가게 하여 탈출 시키려 한다. 이 일을 기획했던 외국 공사관, 선교사들이 곤란하게 되었으며 주도했던 조선 인물 임최수, 이도철은 처형된다. 거사에 가담한 다른 인물들은 외국 공사관 또는 선교사 집으로 피신한다. 이 일로 인해 미우라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낭인들을 일본은 석방하는데, 그 이유로 외국인들도 조선 내정에 간섭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아관 파천: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러 갔던 틈을 타 러시아 군사들이 서울에 왔다. 러시아 군사들이 제물포항을 통해 건너와 서울을 철통 경비한다. 이러한 러시아의 도움을 통해 고종은 밤에 궁녀의 가마에 타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된다. 친일 내각의 수령인 김홍집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을 가게 된다. 고종은 일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며 절치부심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대원군도 얼마 후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