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왕조실록-고종, 개화의 물결과 갑신정변

안개 속 구름 2014. 7. 25. 20:06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 함께 일본이 사신 파견을 요구한다.  김기수 수신사 등이 일본으로 간다. 그들이 목격한 일본의 발전상은 충격적이었다.  일본은 수신사 일행을 극진히 대접을 한다. 한달 남짓한 체류 일정을 소화하고 고종에게 돌아간 김기수는 보고를 한다.  서양의 문물을 통해 일본이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것을 상세히 보고한다.  

 

개화의 분위기: 1879년 원산이 개항이 된다. 1882년 인천이 개항을 하게 된다.  조일 무역이 급증하게 된다.  일본의 기계, 조선의 미곡이 교환된다.   조청무역규모보다 조일 무역규모가 커지면서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게 된다.    중국을 본떠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다. 통리기무아문은 외교 및 통상 전담 기구이다.  수신사들은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의 선진문물을 배워오게 한다.  청나라 이홍장은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 자국에도 사신단 (영선사)파견을 요구한다.   일본 수신사 김홍집은 청나라 환중헌이 지은 조선책략사라는 책을  고종에게 바친다.  친중국, 결일본, 련미국을 주장하는 책이었고, 조정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영의정도 이에 동의한다.



 

임오군란: 훈련도감 군인들의 급여가 13개월 동안 밀리게 된다.  또한 이 당시 군제 자체가 변하고 있었다.   신식 군대들에 대한 특혜는 좋았다.  일본의 신식 군대를 본 따 만든 별기군은 특히 대우가 좋았다.  한 달치 급료를 먼저 주겠다고 해서 훈련도감 군인들이 받았는데, 모래와 겨가 섞여 있었다.  분노가 극에 달한 군인들이 군란을 일으킨다.   백성들도 이를 환호하는데 당시에는 반일 감정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백성과 군인들의 불만은 민씨 세도가들에게 쏠리게 된다.  이때 대원군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반란군들이 대원군을 추대한다.  대원군은 재기 하자마자, 명성황후의 국상을 선포해 버린다.  왕비의 옷을 대신하여 입관 절차까지 밟는다.  중전의 영향력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하면서 실패하게 된다.  임오군란의 결과로 청나라와 일본 군이 조선으로 파견된다.   대원군은 청나라가 자신을 지지 할 거라고 생각했다.  청나라 군대의 초청에 기꺼이 응한 대원군은 수행원과 함께 이홍장을 만난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곳에서 결박이 되고 대원군은 압송된다. 

 




청나라의 생각: 일본의 독주를 막기 위해 청나라는 그 동안 조선의 입지를 넓히는 조치를 취해왔다.  미국과 조선이 수교를 맺도록 알선하기도 했고, 개항을 돕기도 했다. 청나라가 생각하기에 흥선 대원군은 개항을 전면 부정하는 척사론자로 비쳐졌다.  조선이 다시 대원군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차라리 개화론자 명성황후를 복귀 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청나라의 상황: 태평천국운동이 가까스로 진압된 후, 양무운동이 본격화 된다.  신식 학교도 세우고 최신식 무기를 수입해온다.  그리고 개화를 좀더 신속히 수행한다.

 

임오군란의 결과: 일본은 막대한 조선의 배상을 요구한다.  조선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일본은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조선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한다.

 

                                                    (미국 대통령을 당혹스럽게 하는 조선 사신들)

조선의 개화정책: 척화비를 제거한다.  개화파 지식인들의 상소를 대거 수용한다.  통리군국사무아문,  통리교섭통상아문을 설립하여 개화의지를 표방한다.   멜렌도르프 같은 외국인을 관리로 채용하기도 한다.   훈련도감을 폐지한다.  한성신보 같은 근대식 신문사가 생기며, 태극기를 사용하게 된다.  궁에서도 신식 의복을 도입한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이 당시 조선 최고의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세계 정세를 두루 아는 관리였다.  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길준 같은 신지식인 세력들이 등장하며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다.

 

갑신정변: 김옥균 등의 지식인들은 보빙사, 수신사 자격으로 여러 나라를 견학하였다.  김옥균은 여러 나라 중에 특히 일본에 매료되게 된다.  청나라보다 일본을 모델로 삼아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김옥균은 승지로 있으면서 왕과 대화를 많이 한다.  왕도 그에게 상당한 신임을 보인다.  김옥균은 개혁을 위한 차관을 빌려야 한다 생각한다.  고종도 일본이라도 필요한 거라면 기꺼이 배워야 한다 생각한다.  김옥균은 일본의 변화발전에 너무나 매료 되었기 때문에 순진한 발상을 하게 된다.  김옥균은 왕의 친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지만 차관 한 푼을 받지 못하고 돌아 온다.  김옥균은 일본의 속셈과 저의를 잘 파악하지 못한 과오를 범한다.  급진개화파인 김옥균 세력은 너무나 조급한 마음이 앞섰다.  김옥균은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이 발발한 이 때가 일본식 개혁을 시행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1884년 우정국 낙성식 때 조정의 주요 대신들과 각국 공사들이 초청되었다 이때를 기회로 궁에 불을 지른다. 대혼란이 일어난 틈을 타 고종을 경우궁으로 모셔온다. 

약속 대로 일본군이 달려와 왕과 왕비를 호의 한다.  그리고 정변 세력은 여려 반대 대신들을 살해한다.  하지만 청나라 위안스카이는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명성황후가 창덕궁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김옥균 세력은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  창덕궁 근처에 청나라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 병력보다 청나라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생각보다 위안스카이의 대응이 즉각적이었다.   김옥균 세력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김옥균)

톈진 조약: 이토히로부미는 청나라와 조약을 맺는다. 조선으로 군대를 보낼 때 상호 보고를 해주기로 한다.

 

갑신정변의 의의: 나라의 국운을 염려한 젊은이들의 혈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너무나 순진했고, 일본의 속셈을 잘 몰랐다.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 고종이 보는 면전에서 고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신과 내시를 죽이는 미숙함을 보인다.  가장 기본이 되는 군사세력을 마련하는데 미흡했다.  일본의 침략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재력과 군사력이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정변을 일으킨다면 추후에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거라는 예측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