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왕조실록-영조, 당쟁의 폐해를 깨달은 영민하고 감수성 풍부한 왕

안개 속 구름 2014. 7. 8. 22:02

영조:조선의 21대 임금이다.  경종과는 달리 노론의 시대가 된다.  정통성의 취약성을 안고 출발한다.  더더군다나 출신도 취약하다.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었다.   경종의 독살설도 발목을 잡는다.  온건파를 중용할 수 밖에 없었다.  



 

탕평책:  양극단을 배격하고 중도를 등용하되, 소론 중에 온건파, 노론 중에 온건파들을 중용한다.  영조의 전략상 초기에는 소론을 등용한다. 

비록 소론 출신 이광자를 영의정으로 삼았지만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함으로써 왕의 뜻이 노론에게 있음을 표현한다.  집권의 정통성을 합법화 하고 탕평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한 초석이었다.





 영조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왕이었다.  소론을 내치지 않았고, 노론과 노선을 함께 하였지만 때로는 노론에게도 강한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며, 그들의 판단 착오를 경계했다.

 영조는 노론의 왕이 아니라 사대부와 백성의 왕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소론도 안고 가기를 원했다.  물론 시대적 요청에도 부흥하는 것이었다.

당이 있으면 왕도가 탕탕할 것이며, 당이 없으면 왕도가 평평할 것이다는 서경의 구문에서 원용하여 탕평책이라 자신의 정책을 명명한다.   치우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후 탕평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영의정으로 중용한다.   소론의 과거사를 들추어 처벌을 주장하는 강경한 노론대신들을 면직시킨다.


                                                            (korea.kr)

 

이인좌의 난: 청주에서 무신년에 일어난 난이다.  이인좌의 난의 폭발력이 축소 될 수 있었던 것은 탕평책이었다.  사실 이때는 소론이 정권을 잡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이인좌의 난은 소론 주도의 반란이었다.  소론과 남인의 극단적인 매파 세력들이 연합하여 일어난 난이었다.  다행히 소론 정권이 소론 반란을 진압한다.  진압의 명분이 강했기 때문이다.  영조가 추진한 탕평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난의 명분이 약했다. 경종 독살 설을 내세우긴 했지만 집권 세력을 몰아내겠다는 의지 뿐이었다.  삼남에서 발기했으며 서울에서 내응할 작전까지 세웠었지만 무너지고 만다. 

 

영조의 대책: 영조는 이인좌의 난으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과격한 반격을 하지 않는다.  탕평책을 꾸준히 견지해 나간다.  노론 강경파는 탕평책이 이인좌의 난의 원인이라고 지목했지만 사실 역사는 영조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경종시절 건저 대리 사건에 대한 역사 규명이 문제가 되었을 때 소론 측이 오히려 충(忠)으로 규정 해줌으로 굉장한 양보를 하고 영조의 탕평에 큰 힘을 실어 준다.  신임사화로 유배된 홍치중을 다시 부르는 성과를 낸다.  노론 측은 이를 못 마땅하게 생각한다.   특히 소론의 영의정 이광자를 집중 탄핵하기 위해 노력한다.  

 

영조의 성격: 정치적으로 노회하고 노련하면서도 감성이 풍부한 왕이었다.  노론과 소론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왕권 강화에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을 잘알았다.  소론과 노론의 정권 교체가 일어날 때에도 굉장히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연착륙을 시킨다. 

 

영조의 시련: 영조의 정통성 취약을 계속 공격하고, 인정하지 않는 노론 , 소론, 남인 강경파들이 꾀나 많았다.  경종이 독살 되었다는 심증을 굳힌 사람들은 거의 죽음의 길로 뛰어들면서까지 영조를 공격했다.   어떤 사람은 과거 시험장에서 답안지에 경종 독살 설을 적어 냄으로 자살 테러를 한다.

 

영조의 척신: 영조도 말년에 척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척신 중 대표적 인물은 홍봉한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였다.   경주 김씨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 김한구의 아들 김귀주 역시 척신의 일원이다.   김한구 세력은 홍봉한에게 밀려 힘을 써보지는 못했다.   영조는 옹주들도 많았다.  특히 혜경궁 홍씨는 화완 옹주를 싫어했다.

 

영조 정치의 한계: 탕평책은 당쟁의 폐해를 없애는 데 어는 정도 공헌하였지만 결국 척신 세력을 키움으로 훗날 세도 정치의 씨앗이 된다.  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은 조선의 문화가 융성한 르네상스 시기였던 것 만큼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