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헌종, 철종 연간/ 김조순/안동김씨/풍양조씨
헌종이 8살에 즉위 한다. 순조 시절에 이미 김조순이 막후의 실세로 조정을 장악했다. 김조순 말년에 자기 아들 친척들이 세도정치를 본격화 한다. 헌종이 즉위한 뒤부터는 순원왕후가 수렴 청정을 할 때 의지할 세력이 자기 아버지 김조순 집안이었다.
순원왕후는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이었던 효명세자를 추승한다. 아들이 왕으로 인정을 받아야 본인의 위상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세자빈 조씨도 왕대비로 격상 되게 된다.
주요한 정책은 비변사가 결정하는데 비변사의 주도권을 안동 김씨가 갖게 된다. 일종의 연합정권 즉 풍양조씨 등의 가문이 연합 하였지만 주도권은 안동 김씨가 행사한다.
비변사란 사실 크게 필요치 않은 기구였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비대해지게 된다. 영조, 정조 때는 일상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기구가 아니었지만 헌종 때 의정부를 완전히 대체하는 세력이 된다. 비변사란 사실 비상 시국 대책 회의였다.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활용하여 정치적 실력을 행사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 생각하였다. 3정승이 있는 의정부보다 소집이 쉽고 신속히 의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헌종 때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천주교의 교세 확대 이다. 위협을 느낀 조정은 박해를 단행한다.
천주교 박해: 1839년 헌종 5년 2차 천주교 탄압이 시작된다. 기해박해이다. 1791년 정조 때 기유 박해와 다른 점은 주도면밀히 기획된 부면이다. 정약용 집안이 탄압을 받게 된다. 서양 신부들이 검거 된다.
김대건이 최초의 조선의 신부가 된다.
안동 김씨는 순조, 헌종, 철종 까지 3대 걸쳐 왕비를 배출하면서 세력을 재생산한다.
헌종이 15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 친정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변화가 거의 없게 된다. 왕실의 자손이 씨가 마를 정도로 사라지게 되고, 세도 가문의 후손이 증가하는 기현상이 19세기에 극에 달한다.
왕이 20세가 되었을 때 안동 김씨와 맞서려 한다. 삼사 대간들이 안동 김씨를 탄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신책만 추구한다는 헌종의 질타가 있었고 그들을 파직하게 된다.
안동 김씨가 이 시기에는 바짝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헌종이 일찍 사망하게 된다. 안동 김씨는 이후 헌종이 임명한 모든 장수들과 신하들을 물갈이 한다.
사색 당파가 있었던 때보다 더 바람직하지 않은 정국이 바로 세도 정치라고 볼 수 있다.
헌종은 23세에 사망한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효명세자도 22세에 죽었다.
헌종의 왕비는 두 명이다. 안동 김씨의 딸과, 남양 홍씨의 딸이다. 하지만 헌종은 경빈 김씨를 총애 했다. 창덕궁의 낙선재가 헌종이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것이다. 사실 경빈에게서 후사를 기대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후사를 낳지 못한다.
국상을 치를 때 세도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철종 발탁: 정조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중에 한 명인 정계 대원군(추존)의 아들이 철종이다. 강화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가문의 철종이 갑자기 발탁되게 된다. 졸지에 왕이 된다. 그가 이원범이다. 철종은 민간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어서 빈농에 대한 연민으로 선혜청을 열어 선정을 베풀려고 했다.
철종의 왕비 역시 안동 김씨로 간택 된다. 세도가는 헌종 말년 취했던 정책을 무위로 되돌리게 된다.
추사 김정희: 안동 김씨에 반하는 행동으로 계속 수난을 당하게 된다. 그는 금석학, 추사체의 대가였다. 그의 제자는 3000명이나 되었다(추사문하삼천사). 19세기 문화의 원류라 볼 수 있다.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한 사람도 김정희 였다.
김좌근의 애첩 나주 기생 양씨: 나주 기생 양씨에게 관직을 청탁하는 사람들이 몰려 왔는데, 안동 김씨 정치의 서글픈 자화상을 대변하였다.
철종의 노력: 역량은 어느 정도 있었던 왕이었다. 하지만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 본인 역시 자신이 적자나 적손이 아니라 상징 왕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분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철종 때에는 모든 관직, 지방 수령 자리까지 안동 김씨가 독식하게 된다. 이때 실록의 기록은 너무나 부실하기 짝이 없다. 왕권의 미약이 들어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