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안타까운 조선의 선각자/조선의 새로운 외교정책.

안개 속 구름 2014. 7. 3. 22:53

 광해군의 업적은 창업 군주 태조에 버금 간다.  일반 왕들은 능행 정도 다니면서 백성을 접한 적 있은 있었어도, 광해군처럼 세자시절에 전국을 누비며 나라를 재정비 한 왕은 없었다.

백성과 신하들의 희망이 모아지는 가운데 즉위한다.

 

유영경의 탄핵: 선조가 인목대비를 계비f로 들였을 때 영창 대군을 낳는다.  유영경은 용감하게 세자를 축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유영경은 영의정이었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낳았을 때에도 광해군을 차마 폐하지 못한다.  즉위 후에도 영창대군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유지를 남긴다.  유영경은 이 말을 자신에게 불리하게 생각하고 전달하지 않는다.  유영경은 결국 유배되고 유배지에서 최후를 마친다.  만일 선조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그의 목표는 성공했을 것이다.

 

임해군 탄핵: 대간들이 임해군을 고변하여 역모로 몰아 간다.  살아있는 왕의 형님이라는 정치적으로 부담 가는 존재였다.  실제로 임해군은 말썽꾸러기였다. 하지만 왕권에 욕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과단한 성격은 역모로 포착이 되어 유배된다.  광해는 극구 그를 변호하려 했다.  하지만 대간들은 임해군에 대한 심증을 강화했고, 관철 시킨다.  명나라는 광해군 책봉을 계속 미루면서 임해군을 개인적으로 만나려고 했던 것도 상황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사진출처:조인스)

 

옥사: 광해군은 역모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몹시 컸다.   별일 아닌 사건들을 확대 시켜 추국을 하고 수많은 옥사를 일으켰다.   광해 옥사의 공안 정국을 일으킨 사람이 이이첨이었다.  그는 허균, 영창대군 옥사, 및 인목대비 폐위를 기획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광해군 경력에 결정적인 위험으로 남게 된다 .  광해군은 권력형, 공작정치 형 인간인 이이첨을 능수 능란하게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정인홍 같은 강직한 사림형 인간도 정치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광해군 때에는 무고한 역모 고변이 자주 일어난다.   원래는 무고한 고변을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하였지만 역모에 대해 히스테리컬 한 반응을 보이는 광해군의 정국주도 시기였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러 관아에 끌려온 무뢰배 들도 시간을 벌 심산으로 역모를 들었다는 말을 하곤 했다.  심지어 그런 자들이 무죄로 방면되는 일들도 있었다.

 

공빈 김씨:  광해군은 어머니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한다.

 

영창대군:  폐 서인 되고 유배된다.   그가 굶겨 죽임을 당했는지 , 아니면 증살을 당했는지, 독살 되었는지는 기록이 분분하다.

 

인목대비: 광해군에게 영창대군보다는 사실 인목대비가 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광해군의 심중을 간파한 이이첨이 폐서인을 도모하지만 신하들의 강한 반대로, 결국 서궁에 선왕의 후궁 자격으로 유폐 조치 된다.  실제로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는 폐모 조치였다.  이후 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의 죄목가운데 폐모살제를 거론하게 된다.

 

허균의 옥사: 허균은 홍길동전을 집필한 정치인이다.  사실 그는 문학가 보다는 정치인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동인의 영수였다.  그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의 문장 실력은 매우 출중했고, 자유분방했다. 기생과도 거리낌없이 어울렸고, 성리학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사상과 학문을 가지고 있었다.    유교질서에 이탈적인 행동을 자주 한 것으로 알려져 적이 많았다.  그는 이이첨과 잘 협력하여 광해군을 위해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정적이 많아 결국 탄핵을 받아 축출 되게 된다.   사고 자체가 너무 거침없었기에 이이첨도 부담을 느꼈다.  폐모 사건을 이이첨이 주도했지만 부담을 느끼고 발을 뺐다. 하지만 허균은 눈치 보지 않았다.  광해군도 결국 허균을 포기하게 된다.   허균은 폐모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만회하려 했다.

 


중국의 정세: 후금의 부상으로 중화 세계가 크게 요동 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광해군과 신하들이 대척점에 서게 된다.   비록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움을 주었지만 광해군은 명나라의 빚을 갚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광해군은 이미 명나라의 국운이 쇠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명나라 군은  오합지졸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아직 임진 왜란에서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신하들은 실정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명분론에 빠진다.   이이첨 역시 이 안건에 대해서는 광해군과 심하게 대립한다.   이이첨은 폐모 사건 때 실추된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 했다.  그 역시 사대부의 힘을 의식했다는 반증이다.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과 밀지를 주고 받으며 실리적인 군사활동을 한다.  광해군 재위 기간에는 중립 외교가 계속 유지된다.   성리학 명분론에 함몰된 조선에서 광해군의 의지가 빛을 발하는 사건으로 재조명 되는 부분이다.   중립 노선은 대북 세력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오해 되어서는 안 된다.  왕 스스로의 의지로 밀어 부친 것이다. 



(사진출처:pinkwink.kr)





광해군의 성격: 점쟁이나 풍수가들과 친하게 지냈다. 여러 채의 궁궐을 재건 또는 신축할 때 풍수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광해군은 새로운 건국을 시도했다. 왕실의 위신을 강화 하기 위해 많은 건축을 한다.  임진왜란 이후 필요한 재건활동이라 생각했다.  교하 천도까지 생각을 했다.   인조 반정 이후 많은 점쟁이들과 풍수가들이 처형됐다. 

 

인조 반정: 무인 쪽과 서인 쪽의 문인들이 각각 반역을 계획했다가 두 집단이 만나게 된다.   서인들이 광해군 때 소외 되었었다.  상당히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었다.  동원한 군사가 몇 백명 밖에 안됬다.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 날 때는 몇 만을 동원해도 힘들다. 인조 반정 후 지방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 났을 때 약  일 만의 군사가 함께 했지만 진압이 되었다.  지방에서 올 때는 전쟁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능양군이 가담하여 훗날 인조가 된다.  이서ㆍ이귀ㆍ김유 등 서인 세력이 정변을 일으킨다.   

 

김개시: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상궁이었다. 미모는 출중하지 않았으나 영리하고 지혜가 많았다.  원래는 후궁이 될 기회도 있었으나 상궁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대외 활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그녀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반정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   마지막 반정 때 까지도 광해군은 김개시의 말을 신뢰하여 외적이 침략한 줄로 알았다고 한다.

 

인목대비: 능양군이 성공하고 나서 인목대비를 만난다. 옥쇄를 주어야 하는데, 인목 대비는 처음에는 반대한다.   광해군의 머리를 가져와야 허락하겠다고 한다.  신하들이 그녀를 달랜다. 

 

광해군 정권의 의의:  외교는 정말 잘했지만, 무리한 재건 사업으로 민심이 이반 되었다.  인조 반정 후 인조가 계속 성공적으로 정권을 유지한 것을 보면 광해군 말년의 지지도가 많이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덕형, 이항복: 광해군 시절에 대표적 명 재상들이다. 중국어에 능했고, 광해군의 독주를 용감하게 지적하는 기개가 있었다.  굉장히 유능한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번갈아 가며 영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다.

 

 

광해군 19년의 유배 생활: 제주도에서 인고의 생활을 보낸다.  또 다시 왕으로 추대되기를 희망 삼아 견뎠으나 역모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울었다고 전해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