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정여립의 공화주의 사상과 기축옥사. 율곡의 10만양병설

안개 속 구름 2014. 8. 13. 21:05

 연산군 이후 신하는 임금의 얼굴을 함부로 보지 못했다.  연산군이 그 꼴을 못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물러난 이후에도 궁중 예법으로 굳어져서 신하들은 용안을 함부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선조시대의 정여립은 임금의 눈을 당당히 바라보면서 얘기하는 신하였다.  정여립은 체제 비판적 인물이였다.  정여립은 원래 율곡 이이와 친분이 두터운 서인 출신이었지만 이이의 죽음 이후에는 동인에 가담하여 서인을 비평하는 입장을 취했다.  선조가 싫어 했던 인물이었다.  조선 역사 최초로 당적을 바꾼 인물로 여겨진다.

황해도 관찰사 한준이란 사람의 비밀 전갈이 올라온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었다.  전주에 있는 정여립이 황해도까지 손을 뻗어 세력 확장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정에서는 정여립 체포 명령을 내린다.   정여립은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죽이고 스스로 자살한다.   정여립의 사상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선진적인 것이었다. 그는 인권을 높이 평가했다.  천하는 만민의 것이라는 그의 이른바 '천하공물설'은 서양의 사회계약론 보다 더 앞서 나온 계몽 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만민평등의 계모임인 대동계를 조직하여 조선을 전복하려 했던 것이다.   

 


정여립 죽음의 여파: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인해 1000명까지 죽임을 당하는 기축옥사가 벌어지고 만다.  역모 사건이 당쟁으로 까지 확대 되었던 것이 공안 정국으로 치닫게 되었고 피를 부른 것이다.  선비들이 주로 죽임을 당하는 사화보다 피해 계층이 두루 넓었기 때문에 옥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어린아이도 죽고 심지어 노비도 죽었다.  정여립의 사상은 이후 동학농민사상에까지 맥을 이어가게 된다.   정여립의 사상은 오늘날 공화정과 매우 비슷하다.  정씨가 이씨를 대체하여 왕조를 수립한다는 정감록 예언의 배경도 정여립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학계의 공론이다.

기축옥사는 서인에 의한 동인에 대한 정치 보복이었다.  정철이 주도했고 선조는 정철을 정략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선조는 정철마저도 실각 시켜버린다.  세자 책봉과 관련된 문제가 화근이 되었다.  왕자를 옹립할 뜻을 내비쳤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둘째 인빈 김씨에 대한 총애로 신성군을 계승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정철이 신성군 모자를 제거하려는 모략이 있다는 소문이 선조의 귀에 들어오게 된다.  때마침 경연에서 정철이 세자책봉을 건의하자 선조가 오해하여 대노하게 되고 그 자리에서 그를 파직시킨다.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이 온건파 남인과 강경파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북인은 정철의 탄핵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관여하게된다.  북인이 기축옥사의 피해를 가장 많이 봤기 때문이다.  기축옥사는 이것으로 마무리 된다.

 





선조실록의 특색: 선조실록은 두 가지이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북인 정권 때 쓰여 졌고, 선조수정실록 인조반정 이후 효종 때 서인 관점으로 쓰여진 실록이다.   선조실록은 그만큼 당파싸움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선조실록은 율곡 이이를 폄하한다.  율곡이 부모의 뜻을 저버린 불초 자식으로 불가에 귀의한 중이었다가 환속한 사람이라는 식이다.  선조수정실록에 비로서 율곡의 진면목이 들어 난다. 이이의 10만 양병설도 수정실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동인 측은 반대했다고 한다.  특히 유성룡이 반대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미리 예견했던 쪽은 서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남명 조식 계파에 속한 선비들 중에는 왜란 발생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준비했다는 기록도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서인의 이런 자부심이 서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