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왕조실록- 정미칠조약과 경술국치, 일본의 우아한 각본과 연출

안개 속 구름 2014. 8. 6. 01:07

 고종의 퇴위: 이토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들어오면서 고종은 황제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고종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밀사를 파견한다.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해외에 알리면 일본에 자극을 줄 수 있다는 희망을 걸었다.  이준, 이상설 들에게 특명을 주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보낸다.  일본은 이미 손을 써놓은 상태였다.  대표로 인정을 못 받아 참석을 못했다.  하지만 기자를 통해 을사조약의 진상을 알려 신문에 실리게 되는 성과를 달성했다.   1907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회의 참석도 일본의 방해 공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론 전에서는 부당함을 알리는 성취가 있었다.   이준은 화병으로 헤이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평화회의는 사실상 열강들의 이전투구적 색채가 짙은 회의였다.   외교권이 없는 상황에서 밀사를 파견한 것에 대해 고종의 사과를 일본은 요구했다.   내각 회의에서도 대신들이 고종을 협박하며 양위만이 진정한 사과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은 고종의 퇴위를 기정사실화 해버린다.  너무나 강제적이었다.  조선의 신하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사실상 황제를 신하들이 핍박한 것이었다.  이 당시 총리는 이완용이었다.  일본은 재빨리 공식화하기 위해 황제의 의복을 내관에게 입히고 조서를 작성하게 했다.  세자 역시 대역을 사용했다.  

 

 정미칠조약: 한일신협약이라고도 한다. 병합의 전 단계를 위한 협약이었다.  모든 행정처리와 인사처리를 통감의 승인 또는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일본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해야 했다. 그리고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킨다.  한국 장교 중 한 사람은 권총으로 자결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정미칠조약의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고,  의병들과 퇴역병의 연계가 강화되면서 좀더 조직적인 의병활동이 가능케 된다. 심지어 그들은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의병활동은 결국 실패하게 되고 상당 부분 국경을 넘어 독립군으로 편입된다.

 




 순종 황제 즉위: 양위 식 한 달 뒤에 새 황제 즉위식이 거행된다.  순종은 황제가 된 뒤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병약했고 소심했다.  어머니인 명성황후는 고사 하고 아버지 고종 조차 닮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영민한 군주였어도 사실상 그가 달라지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경찰 제도, 사법제도 까지도 일본에게 위탁하게 된다.   나라가 없는 상황이었다.

 


 안중근: 이런 상황에서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하여 죽이게 된다. 놀랍도록 침착하게 여섯 발 총알 중 세 발을 정확히 이토히로부미를 맞추고, 만일을 대비하여 주변의 세 사람을 정확히 한 발씩 맞춘다.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세례명 '토마스' 즉 도마로도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토 처단을 성공한 후 그는 일본이 관리하는 루쉰 감옥에 투옥된다.  이토의 동양평화론이 얼마나 허구였는지를 알리기 위해 자신의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지만 완성을 하기 전에 사형을 당한다.  재판정에서의 그의 의연한 태도는 일본인 변호사마저 감동을 시켰다고 한다.  이토의 죽음으로 일본의 여론은 격해진다.   조선의 친일 단체 일진회가 단독으로 합방 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다.   상소를 순종 황제에게 올리고, 통감에게 탄원서를 올린다.  내각의 수반 이완용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새로 부임한 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는 어전 회의를 열어 한일 합방을 밀어 부친다.  이를 경술 국치라 한다.  조선 500년의 역사가 마무리 지어진다.   조선은 총독부의 통치를 받는다.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불리고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불리었다.  영친왕 이은은 세자로 격하 된다.  이은은 순종 승하 후 창덕궁에서 왕위를 물려 받고 창덕궁 이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