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 시대의 추국 기록 - 조선이란 나라의 유별난 기록에 대한 집착.

안개 속 구름 2014. 11. 1. 23:04

 

 임금이 직접 하는 친국,  대리인이 하는 정국이있다.  자백을 받는 것을 지만이라 한다.  "지만합니다." 라고 말 할 때까지 고문을 가한다.

신장이라 하는 고문 전문 매를 사용했다.   곤장은 신장보다 더 크고 더 혹독하다.  일반적으로 백성을 때릴 때는 신장을 사용했다. 

신장을 사용할 때는 조선 전기까지 한 차례 30, 하루 두 차례 이하였다.  심문 당하는 사람들은 1차에서 3차까지 어떻게든 견딘다. 하지만 5차례를 넘기면 극단의 방법을 썼다.  독약을 부탁하고 죽는 경우이다.  보통 죄인의 가족이 뇌물을 주고 몰래 독약을 먹였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연좌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왕의 입장에서는 반란을 모의했다는 자백을 듣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만일 모반의 지만(고백)을 받아내면 당사자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연좌에 묶여 처형당하게 된다. 그래서 심문을 받는 가족 역시 몹시 초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추국 죄인들은 어떻게든 멸문 지화를 면하기 위해 지만하지 않고 견뎌 내거나 물고를 당하여 죽는 게 허다했다.  또는 지레 목숨을 끊었다. 

 추국 기록에는 상당부분 천주교 신자 관련 내용도 많이 있다.  천주교에 유화적이었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곧바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다.  당시 지배층들은 천주교를 반체제적인 사상으로 생각했다.  실학자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로서 심문을 받는 기록도 볼 수 있다. 

 양반 상놈 이라는 신분 지배 속에서 살다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실을 알았을 때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목숨을 걸었던 천주교인들의 추국 장면은 가슴 뭉클하게 한다. 

동료 신자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다면 먼저 죽여 달라고 애걸하는 장면도 추국 기록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정말이지 기록의 나라이다.  보통 임금이 죽으면 승정원에서 실록 청이 신설 되고 실록이 편찬된다.  그리고 승정원의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들을 취합하고 취사선택을 한다. 

하지만 추국 기록은 심문과정에서 아전들이 즉석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문장이 매우 난삽하고, 한문과 한글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임금이 요구할 때에만 정선하여 간추린 글을 올렸다.

그렇기 때문에 추국 기록은 조선왕조 실록보다 훨씬 조선 민중의 삶을 생동감 있게 전달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 문화 전반에 깃든 민중들의 속살을 과감 없이 보여준다.

이 모두가 기록을 유별나게 중시했던 조선이란 국가의 독특함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은 유독 기록을 남기는 것을 좋아 했을까?  황제 국이라 자처하는 중국 보다 더 집요하고 세심한 측면을 엿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조선은 중국을 사대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사대를 받는 나라 보다 사대를 하는 나라가 원리 원칙에 더 집착하는 법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우리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공산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품이다. 하지만 그들 사상의 요람이었던 독일이나 영국보다는 소련이나 중국에서 그들의 사상이 더 극성을 부리며 통치원동력으로 작용했던 이유를 우리는 생각해 본일이 있을까?   그게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변부에서 발생하는 사상이나 이론은 하찮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이 고안한 특정한 사조나 이론은 원거리를 갈 수록 가속도가 붙으면서 교조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하고 급기야 한 나라나 문화권을 통째로 집어 삼키는 괴물로 변하게 된다.  극동아시아에 있는 북한을 보면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사람은 먼 거리를 달려 오면서 출처가 희미해진 이론을 좋아하고 신뢰한다.   자신의 시대적, 지리적 환경은 항상 고단한 인생을 반영하는 추레한 뒷간으로 보이지만, 자기 세상을 일거에 쇄신해줄 메시야 같은 한줄기 서광의 출처는 알 수 없는 머나먼 꿈의 세계로 규정하고 싶은 것이 우리네 바램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기초로 세워진 나라이다.  성리학은 송나라의 주자가 정립한 학문이다.  고대의 유교에다가 도교 불교의 형이상학을 가미한 새로운 유학이 성리학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입장에서 성리학이란 자국에서 생산한 학문이기 때문에 애착이 조선만큼 강하지도 않았고, 현실과 이상이 충돌할 때 신속히 절충점을 찾는 면에서 훨씬 더 융통적으로 성리학을 원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성리학의 아류 격인 양명학이 등장했을 때 훨씬 더 관대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하지만 조선은 ONLY 성리학, 무균질 성리학을 고집한다.  너무나 교조적이고 경색된 이런 분위기는 조선 왕실이 정국을 운영하는데 큰 장애로 작용하게 된다.  끊임없는 소모적 논쟁,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독선, 타협을 변절로 호도하는 분위기,  관념론에 빠진 관료들의 행정실무능력 결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폐단을 낳는다.   끊임없이 신권의 견제를 받는 왕권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전념할 수 없었다.  

 조선의 찬란한 기록 문화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중국을 사대하는 사대부의 나라로서 종묘사직의 기록을 철저히 남겨 성리학이 궁극의 실체로 숭배하는 태극의 역사를 남겨야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사필귀정하는 태극의 오묘한 조화였고, 태극의 손과 발인 이와 기가 순행하여 음과 양이 되며  오행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우리는 조선의 역사 기록에 대해 너무나도 큰 긍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기록을 대할 때 그 기록이 보존될 수 있었던 서글픈 진실도 왜면 해서는 안 된다.  기록에 대한 정성만큼이나 백성을 돌보았다면 지금 우리는 훨씬 더 건전한 사회환경에서 살아가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외래 사상이나 이론을 가지고 와서 상대방을 공격하는데 능수능란하다.    빨갱이(공산주의), 종북(주체사상), 친일(신도), 친미 등등..... 그리고 칼뱅주의에 함몰된 한국의 교인들.... 우리가 언제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 형제를 존중했던 적이 있었나....  금발 머리, 파란 눈에게는 너무나도 비굴하리 만큼 관대하고,  한글 맞춤법을 틀린 것보다 영어 철자를 외우지 못하는 것을 더 창피하게 생각하고,  외국인과 악수할 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실제로 영국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영국 서점에서 판매되는 한국인 특징 관련 책에서는 "한국인은 상대방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자국인에게는 연공 서열, 선배, 후배 따지고 사회성을 유난히 강조하면서, 홍콩이나 서구 여행을 할 때에는 개인주의와 ,인본주의를 찬양하기에 열을 올리는 우리의 자화상....  중도보다는 극단으로만 치닫는 집단 히스테리... 정말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