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멸치 젖이 비린내가 많이 난다 해서 구하기도 힘들고 사람들이 기피하기 때문에 김장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수도권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결혼 상대자를 타 지역 출신을 선호하게 되면서 멸치 젖은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서울 사람과 남부 지역 사람들의 식성의 차이가 가져오는 촌극이기도 했다. 김장 때마다 어떤 젓갈을 사용하느냐가 갈등이 된 것이다.
경상남도나 전라남도 사람은 굉장히 타박을 받았다. 배추김치에서 비린내가 낫기 때문이다. 깊은 맛을 잘 몰랐기 때 문이다.
멸치는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지만, 멸치는 한자로 '취'라고 불렀다. 등이 푸른 생선의 일종인데 , 청어 또는 정어리 과에 속한다. 야행성이고 밤에 때로 몰려 다녔기 때문에 조선시대 때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밤에 횃불을 켜고 큰 망탱이를 들고가서 멸치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오면 건져 올렸다.
1803년에 김여라는 사람이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에 있으면서 집필한 '우해이어보'라는 책에서는 멸치를 '멸아'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통 그 지역 방언으로 '멸'이라고 불렀다.
양반들이 멸치를 업신여겨서 '멸'자와 '치'자를 붙였다는 속설은 근거가 전혀 없다.
1814년에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에 유배 가있을 때 기록한 '자산어보'에서도 추어(취)라고 하면서 속명은 '멸어'인것으로 말하고 있다. "멸치는 불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밤에 등을 밝혀 움푹 패인 곳으로 유인하여 망으로 떠올린다. 젓갈 용으로 쓰기도 하고 말려서 쓰기도 하지만 선물로 보내기는 어렵다. 왜냐면 천한 물고기라서" 라고 언급하는 대목도 있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특히 김영삼 정권 때는 멸치가 금보다 비싼 선물용으로 쓰였던 적도 있다.
요즘도 남해에서는 물길을 잡는 아주 오래된 방식을 사용해서 멸치를 잡고 있는데, 어른 손바닥의 중지만한 멸치가 잡히기도 한다. 요즘에는 멸치 회를 즐겨 먹기도 한다. 지금은 냉동 냉장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 예전에는 등 푸른 생선으로 빨리 상하기 때문에 신속히 쪄서 먹거나 염장을 하였다.
멸치는 때로 몰려 다니고 힘이 굉장히 세다. 동해안에서도 잡히는데, 멸치 때가 방향을 잘못 잡아서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몰려와 물이 빠져 나간 사이에 온 해변이 멸치 색으로 반짝반짝 빛날 때 그걸 주어서 먹기도 했다.
멸치 젓갈을 보편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들이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어로를 장악할 때 저인망 형태로 건저 올려 바로 삶아 버렸는데, 삶아서 말리면 마른 멸치가 되었고, 젓갈로도 사용되었다. 멸치가 구하기 쉬워졌기 때문에 추자도와 거문도 지역에서는 멸치젓을 굉장히 많이 담았고, 그 일대가 멸치가 움직이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남해안 전체가 멸치 젖이 유행하게 된다.
요즘 시대에 와서는 유통하기 쉬운 형태로 가공해야 했기 때문에 멸치 액젓을 만들었다. 멸치를 2년 정도 삭히면 뼈만 남고 발효가 되어서 액이 된다. 그 액을 걸러내어서 솥에 끓여 간장처럼 만들고 시중에 유통하는 것이다. 멸치 액젓은 비싸기 때문에 대용으로 요즘은 까나리 액젓을 많이들 사먹는다. 액젓이 각광 받게 된 또 다른 요인은 아파트 문화가 도입되면서 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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