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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왕조실록-연산군 광기의 시작/흥청망청/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은 유자광의 대간 세력과 안정을 유지하면서 일정 기간 유지한다.  

우선 초창기 사화 전후에 유의해 볼만한 인물은 노사신이다.

 

노사신: 대간들에게는 간신의 대명사로 낙인 찍혀서, 대간의 탄핵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막상 무오사화가 터지자 , 대간들의 언론확대를 끝까지 옹호함으로 정승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 받는다.

 

 연산군은 왕으로서의 특권을 철저히 누려야 한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대간들과의 마찰을 사전에 피하는 방식으로 호사를 누리려 한다. 

대간들의 표현은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연산 때 뿐만 아니라 대간들의 과격한 표현은 조선의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대간들의 특권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산의 기질에는 굉장히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연산군은 아래와 같은 조치를 취한다.

 신언패:  말을 삼가하는 패,  연산군은 '입은 화를 가져오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함구령을 내린다.

 

이후 또 다시 광풍이 불어 닥친다.





 

갑자사화: 갑자년 초기에 연산군이 두 선대왕의 후궁들을 비참하게 죽이는 사건 묘사는 어느 정도 창작의 소지가 있다.  이때부터 연산군은 독재권력의 전형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임사홍 같은 소수 측근들만을 데리고 정치를 이끌어 나간다.  갑자사화는 훈구파 대신들 중에 폐비 윤씨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들은 가차 없이 숙청을 당하며 심지어 불똥이 사림파들에게까지 튀게 된다.

모든 땅은 왕의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으로 자신의 사냥터를 넓혔고, 기생과 즐기는 것을 왕의 특권으로 천명한다.   말년에는 더욱더 엽기로 치달아, 부관참시 뿐만 아니라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까지 한다.  나중에는 원칙 없는 복수극 또는 광기를 보이기까지 한다.   연회 때 시를 한 수를 올리라 했는데 두 수를 올렸다고 처벌하는 등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심지어 후원에서 공개 성교를 벌이기도 한다.   유교 정치의 기본 틀이 붕괴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상소나 상언 자체가 불가능했다. 

 


흥청망청: 경복궁 경회루를 가장 잘 활용한 왕이 연산군이다. 기생을 불러서 파티를 한다.  흥청은 기생 중의 으뜸을 일컫는 것이었다.

 

중종 반정: 박원종의 누이가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이다. 연산군이 박씨를 범하는 일이 있었고, 그녀는 자결한다. 이러한 일로 박원종은 앙심을 품는다.  아마 반정의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체의 사실 여부를 확인 하는 것은 애매하다.  박씨는 큰 어머니 뻘이었다.  나이 차이가 났을 것이다   박원종은 무인이다.    이조 참판에서 무관 말단 관직인 부사용으로 좌천 되어 불만이 많은 성희안과 의기 투합하여 모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이조판서 유순정이 안에서 호응한다.  변신의 귀재 유자광은 이에 합류한다.   연산군은 실제 창덕궁에 거처했다.   반정군들이 창덕궁을 포위하여 진을 친다.  왕궁을 포위하자 싱겁게 게임이 끝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