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의 전기 후기로 나눈다.
광해군은 조선 15대 임금이다. 1608년 등극한다. 선조 후빈 공빈 김씨의 차남이다.
선조가 세자 책봉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분조를 하여 왜란에 대처 해야 했다.
광해군보다 신성군을 사실 선조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후 영창대군이 태어난다.
선조는 세자 책봉을 계속 늦추어 왔었다.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을 것이다. 적장자 출신도 아니고 후궁의 차남이다. 다만 신하들의 여망이 광해군에게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분조 활동: 왜란 중 선조의 위신이 추락한 상황이어서 어떤 상소는 광해군을 전하로 선조를 상왕으로 언급한 경우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감히 상상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광해군이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광해는 격문을 보내 의병을 조직한다. 사실상 왕의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선조는 사실상 피난만 하고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광해군 분조 활동에 대한 내용이 많이 누락이 되었다. 중초본에 있는 내용 중에는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내용이 많다. 이후 정묘호란 때 인조의 소현 세자가 분조 활동을 한 사례가 있다. 선조는 유사시에 강을 건너고 양위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역전 되자 선조의 질투심이 생겨나게 된다. 광해군을 폄하하고, 새 왕비를 들이기까지 한다.
공신책봉의 과정에도 무공이 뛰어난 장수들을 폄하하고, 자신을 호종한 공이 없는 신하들을 책봉한다.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 그리고 종종 선위파동을 일으킨다.
이순신이나, 의병장을 평가절하하고, 대부분의 공을 명나라에게 돌린다. 문신들의 무신들에 대한 멸시도 한 몫을 한다. 이순신은 이후 정조대왕 때 본격적으로 부각이 된다.
서양은 전쟁에서 이긴 가문이 솔직하게 왕이 되고, 책임 정치를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적인 왕권을 전제로 신하들이 정쟁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정치가 힘든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당쟁 상황: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진다. 북인들이 강경파 역할을 한다. 북인은 남명 조식을 사상적 수반으로 삼긴 해도 서인과 남인보다는 이념적 결집력이 약했다. 선조 후반에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광해군의 지지세력이 된다.
동인의 유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한다. 서인은 원균을 지지했다. 이순신에 대한 모함은 서인과 대북의 당쟁의 결과로 보긴 어렵다. 선조가 공격의 선봉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동인과 서인의 분리는 매듭 지어졌고, 남인과 북인의 반목이 심화되는 시기였다. 이 때 당시의 남인은 가장 비당파적인 세력이었다. 북인이 왕성했기 때문이다. 이후 북인이 남인을 공격했을 때 대립이 심화된다.
광해의 즉위: 전쟁 이전으로의 복귀. 공납 폐단 극복, 양전사업(토지조사), 세제개혁, 백성에 대한 의료혜택, 대동법에 주력한다. 사대부 정치가 아니라 관료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였다.
대동법: 세법을 단일화하려는 노력이다. 쌀로 통일하여 백성들의 공납의 부담을 줄여 주는 것이다. 정부는 쌀로 받아서 특산물을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갈수록 단순해지는 근대 세법의 정신이 투영되는 법이다.
오현종사: 조선 유학 종주들을 공자와 대등하게 문묘에 합사하도록 결정한다. 후학들에게 엄청난 영광이 되는 사건이다. 남명 조식 계열인 정인홍이 퇴계 이황과 이언적의 합사에 이의를 제기한다. 조식을 올리려는 의도였다.
(퇴계 이황이 모셔져 있는 도산 서원)
'역사의 현장 > 조선 왕조 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실록- 경종, 아우를 아낀 지극히 인간적인 왕 (0) | 2014.07.06 |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안타까운 조선의 선각자/조선의 새로운 외교정책. (0) | 2014.07.03 |
조선왕조실록-연산군 광기의 시작/흥청망청/중종반정 (0) | 2014.06.26 |
조선왕조실록-연산군 일기/무오사화/조의제문 (0) | 2014.06.24 |
조선왕조실록-성종/조선건국의 완성/ 훈구세력/사림파/폐비윤씨 (0) | 2014.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