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3번째 아들 하선군이 조선의 임금이 된다. 그가 바로 선조임금이다.
익선관을 써보라는 권유에 두 형은 경솔하게 썼지만 셋째 하선군은 감히 쓰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그는 평생 익선관을 쓰게 된다.
조선왕실의 방계에서 왕이 된 첫 사례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한계를 고려해 척신을 혁파하고 사림과 새로운 정치를 도모한다.
처음에는 사림이 노당과 소당(젊은 사림)으로 갈라져 대립하게 된다. 이때만해도 붕당까지는 아니었지만 예고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노당의 영수는 이준경이었고, 소당의 영수는 기대승이었다.
하지만 두 영수가 죽자, 붕당정치를 유보시킨 사람이 등장한다. 그가 바로 율곡 이이이다.
율곡 이이: 젊은 나이에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는 특별한 학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퇴계 이황이나 남명 조식의 학풍을 비판하고 고치려 했다. 보수적인 유학자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다. 더군다나 임금에게 감언이설을 할 줄도 몰라 임금도 그를 처음에는 멀리했다. 결국 사림으로 물러가 학문에 혈혈단신 매진하는 유학자가 된다. 성향적으로도 굉장히 실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유교 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이이처럼 초지일관 정치 개혁을 주장한 학자도 드물다. 외치와 국방에 대한 그의 선견지명은 지금도 감탄할 만 하다. 국제적인 정세 판단을 정확히 했던 율곡 이이는 정치 경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중화권과 비중화권의 힘의 역전화를 내다 보았다.
을사 사화에 대한 그의 태도: 그는 을사사화가 조선에 끼친 상처를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인재가 부족한 당시에 많은 선비들이 제거된 일을 비판했다. 그는 을사 사화 때 고문에 참여한 사람을 제명해야 함을 주장한다.
(이미지출처: 국제 신문)
붕당정치의 효시: 선조 시대에 사림이 동인(김효원 중심)과 서인(심의겸 중심)으로 붕당이 갈리게 된다. 이때부터 조선은 본격적인 붕당정치로 들어간다. 서양의 과두정과 조선의 과두정인 당파 정치는 분명히 다르다. 조선의 당파 정치는 책임 정치가 아니었다. 서양의 과두정은 정적을 정치적 파트너로 생각했지만, 조선의 붕당은 정적을 말살하고 통으로 집권하려는 정치였기 때문에 폐해가 매우 극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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