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연산군 일기/무오사화/조의제문
연산의 패륜적인 성격은 과장된 경향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연산군 일기는 반정세력이 쓴 내용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초 자체도 풍부하지 않다. 사관들이 감춘 경우도 있었고, 연산군의 유교탄압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패륜과 폭정이 부각된 이유 중 하나이다.
무오사화가 성종 실록의 사초 문제가 발단이 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사관들의 사초 기록 활동이 위축되었을 것이다.
연산군의 공(貢)은 축소 되고 과(過)는 강조되었을 것이다.
세자 때의 연산: 성종은 자신이 왕으로서 중압감에 시달렸기 때문에 세자를 조금 풀어 주는 경향이 있었다.
연산은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를 닮은 성격이었다. 성격이 너무 과단하고 독재적이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하겠다는 의지가 무척 강했다.
건강: 연산의 얼굴에 항상 종기가 끊이지 않았다.
대행 왕의 묘호 문제: 연산군과 대간들과 긴장 국면이 조성된다. 신하들은 인종을 연산군은 성종을 주장한다. 결국 연산군의 뜻대로 관철 된다. 대간들의 권력의식을 연산군은 익히 알고 있었고 그들을 제압할 기회 중 하나로 여겼다.
대간들의 득세: 성종 이후 커져 버린 대간들은 연산군 때에도 극성이었다. 언론 삼사의 왕권 견제가 가장 심했던 때와 연산군 재위 기간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대간들의 집단 사직과 복직이 반복된다.
폐비 윤씨 문제: 연산군은 생모를 제헌 왕후로 추승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되었던 대신들의 숙청을 예고하는 기초 작업이었을 것이다.
임사홍: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의 사위였고, 성종 딸의 남편이었다. 연산군 생모 폐위문제를 끝까지 반대했다. 강직한 성품때문에 대간들의 질타를 한 몸에 받는다. 결국 성종이 소인으로 낙인 찍고 유배를 보냈으나 연산군이 후에 중용한다.
무오사화: 유자광이 기획한 사건이다. 사초를 본 연산군이 대노하여 김일손이 체포되었다. 사관 김일손이 세조의 비행을 적었기 때문이다. 성종실록 편찬 책임자인 이극돈이 사초를 조사하다가 자신의 비리가 적힌 것을 보고 유자광의 도움을 얻어 정치적으로 공작한 일이었다. 자신의 비리를 희석하고 김일손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일이 큰 문제로 비화된다. 사초를 실제 작성한 김종직은 부관참시되었다. 이극돈이 유자광에게 사초를 보인 것이 큰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