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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예송 논쟁-효종,현종 연간/송시열/윤선도/허적


 

 현종 19세의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등극한다.   효종은 종기로 사망하였다.   종기에 침을 잘 못 놓으면 과다 출혈로 사망하는데, 아마도 후속 조치가 미약하여 이러한 일이 자주 생기는 듯 하다.

 

예전에는 항생제가 없었기 때문에 낭패였다.   종기보다 등창으로 죽는 경우도 많았다. 

 

현종 때에도 예송논쟁이 계속 이어진다.   자의 대비는 인조의 계비이다.  효종보다 나이가 어렸다.  효종의 부인보다도 어렸다.  이때 효종이 승하한 이후 어머니의 상복을 몇 년 입느냐가 핵심이었다.  자의 대비는 이미 소현세자 때 3년을 입었다.   그래서 차남의 죽음에는 1년 만 입으면 되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왕의 죽음은 다르다 하여 3년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불필요한 소모전, 예학과 사상적 논쟁이 조선 정치를 후퇴시킨다.     기년복으로 결정된 상황에서 왕은 추인만 하면 되었다.. 보통 예조가 정한다.  그런데 1년이 다 되가는 시점에서 다시 상소가 올라오며 다시 논쟁이 계속된다.   차남 만을 근거로 하는 것은 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는게 논점이었다.

 

 서인을 끌어 내릴 수 있는 절호의 정치적 기회로 여겼다.   송시열은 차남을 다 서자로 여겼고. 남인은 적통을 인정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맞받아 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은 윤선도이다.



윤선도: 광해군 때 이이첨을 탄핵했고, 효종 때 문과 급제 했으나 남인이어서 지방의 수령으로 전전하다가 현종 때 효종의 장지를 정할 때 강력한 상소를 올린다.   윤선도가 사실은 해남의 유지였다.  그는 호남의 유일한 남인이었다.  보길도에서 많은 문학작품을 썼다.  그는 왕의 예법은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과 다른 것 이다는 상소를 올린다.  영남 유생이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그를 지지한다.

 

 남인은 일반적으로 왕권과 연합하려는 속성이 있었다.  남인은 성리학 이전으로 올라가려 하며, 서인들은 성리학을 강조한다.

 

정치적으로 소외된 남인들은 육경학을 강조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현종은 마침내 예송 금지령을 선포한다.





 

현종: 군사력 강화 유지 이어 받으며, 대동법을 크게 확대 한다.  효종 때 왕권을 능가해버린 송시열을 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가의 세원 확보를 위해 많은 조치를 취하였다. 

   송시열이 건재 한 이상 산당이 정국을 장악하는 상황은 계속 된다.   현종은 이를 견제 하기 위해 반대 세력 인물을 천거 하면 이조가 계속 반대한다.  현종은 송시열을 견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송시열은 아버지의 스승이고 거두이고 왕은 유약한 젊은 이어서 많은 한계를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숙종 임금이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린다.

 


 송시열은 낙향한 후에도 현종에게 계속 상소를 올리고 현종은 비답을 내린다.  둘이 주고 받은 정치 담론 행간에는 격은 있으나 미묘한 알력이 배어 있다.

 

 효종의 비가 죽자 자의 대비 상복과 관련하여 2차 예송 논쟁이 일어난다.  남인과 서인의 논지가 첨예하게 대립 된다.  하지만 이때는 현종이 개입하게 된다.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수용하게된다.   이것은 왕권 강화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낙향한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제수한다.

 


그리고 얼마 후 아쉽게도 현종이 승하한다.  현종의 마지막 업적은 왕권과 신권의 균형 추를 회복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의 왕권 강화 의지 천명은 숙종에게 큰 힘을 주게 된다.

 

예송 논쟁은 정말 어이가 없다.  현종 때 조선에 최악의 기근이 들었고 많은 백성이 죽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생 문제가 아니라 정치 이념에 몰입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종법상 효종은 인조의 정통성 이어 왕이되었다. 하지만 종법상 인조의 둘째아들이다

상을 치를 때 1년상을 해야 한다.   경우 효종의 인조의 왕위를 계승한 장자 아니라

차자라고 인정한 일이 되어 격론이 일어나게 된다. 

 

남인은 효종이  장자의 권위를 물어받은 것임으로 장자의 예를 따라 삼년을

주장하였고,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여서 둘째 아들의 예에 따라 일년을 주장한다.

 

 

일본 은 당시 에도 시대를 맞이하여 상업이 굉장히 발달하며, 중국도 강희 건륭의 번영의 시기를 맞고 있고, 유럽도 계몽주의가 태동하는 시기였다.   이때 동북아 조선은 가장 비참한 시기를 겪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