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인경왕후가 사망하고,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다. 그는 정비가 아닌 계비이다.
장희빈의 등장: 역관 장현의 조카딸, 명성왕후가 그를 경계하여 좇아냈으나 인현왕후가
들이라 허용하여 들어오게됨. 숙종 14년 장씨가 왕자를 낳게 된다. 그가 경종이다.
왕후에게서는 자식이 없게 된다. 숙종은 희빈 아들을 성급히 원자로 삼으려 하자. 인현왕후가 아직
22살이어서 신하들이 반대함. 송시열의 반대 상소가 들어온다. 이로인해 분노한 숙종이 남인을 대거 등용한다.
송시열은 결국 사약을 받고 죽게된다.
송시열: 17세기는 송시열의 세기이다.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이다.
왕을 제외하고 최고의 정점에서 서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다. 노론으로 정권이 회복될 때 그는 다시 복권이 될 뿐만 아니라
송자로 추존된다.
기사환국: 장희빈으로 인해 벌어진 남인들의 권토중래. 송시열의 상소가 발단이 됨.
장희빈을 총애한 숙종이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기위해 단행한 포석이었다. 이로인해 인현왕후가 서인이 된다.
사실 이건 남인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수 였다.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왕비로까지 올리는 첫번째 사례이다.
궁인 최씨: 무수리 신분이다. 숙종의 눈에 띄어 일약 후궁 반열에 오른다. 이후 영조의 생모가 된다.
갑술환국: 장희빈에 대한 애정이 식었을 때 소론 출신을 영의정으로 등용한다. 인현왕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를 다시 복귀시킨다.
이러한 환국 정치를 통해 숙종은 군강신약의 조선을 일군 임금으로 평가된다.
강력한 왕권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들이 벌어질 수 없었다. 무원칙한 환국에 대해 신하들이 부아뇌동했던 원인도 있다.
처음부터 적장자로서의 숙종의 정통성도 한몫을 했다.
숙종의 이러한 왕권강화는 영조와 정조에게도 이어진다. 조선 후기에 마지막으로 신권을 능가하는 왕정의 복고가 일어난다.
숙빈 최씨는 충실히 인현왕후를 지지하며,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게 된다.
인현왕후의 죽음으로 이후, 장희빈이 차린 신당을 목격한 숙종이 분노하게 된다. 결국 숙종은 장희빈을 사사시킨다.
갑술 환국 직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격화된다.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 세자를 옹호하게 된다.
노론은 이를 못 마땅하게 생각한다.
남인은 이후 기를 못펴게 된다. 세력화 되지 못한 남인들은 재야에서 파 묻혀 자기개발서 나 읽는 선비들로 전락한다. 그들 가운데 실학자들이 많이 나오게된다.
숙종의 특징은 왕이 주도하는 정국 운영으로 붕당의 폐해를 막으려하는 것이다.
신하들이 왕에게 영합하려하는 경향 때문에 왕권이 강화된 측면도 있고 신하들이 살기 위해 급급했던 측면도 있다.
숙종 통치의 의의: 숙종은 중화식 자신감을 갖는 왕이었다. 그는 국방강화에도 많은 공을 세운다. 서울 성곽도 숙종때 재정비 되며 금위영을 강화한다.
정종, 단종, 및 사육신을 복권시킨다. 성리학 이념이 구현되는 나라를 재건설한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며 상평통보를 통용하여 화폐경제를 활성화 시킨다. 유통경제발달의 기초가 마련된다. 이로 인해 빈부격차가 많이 커지게된다.
고구마, 감자 ,고추, 담배, 인삼이 본격적으로 확산된다. 그리고 양전사업이 완성된다. 하지만 숙종때 대기근으로 수십만명의 인구가 줄게 된다.
숙종의 시대 전반적으로 동아시아가 융성하는 시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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