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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효종/현종/ 강력한 신권/왕권 약화/예송논쟁/송시열/서인/소현세자



 봉림대군이 드디어 임금이 된다

봉림대군은 병자 호란 때 강화도로 가서 맞서 싸운다.  소현세자의 제일의 경호원으로 자처하며 심양에서도 활동.  강직하고 결기가 있는 왕자였다.

결국 귀국 직후에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인조가 세자로 지목 할 때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관례상 조카가 세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정통성에서 취약한 왕들이 굉장히 자기 절제가 강하다. 가급적 신하의 말을 듣고 사대부와의 관계를 무리 없이 끌고 가려 한다.

정통성의 문제가 계속 지속되는 조선왕조 이다.

 효종의 즉위 다음날 인사 정책 때,  일부 재야 살림들이 등장한다.  송시열도 이때 등장한다.

재야에서 성리학 즉 의리 명분론에 정통한 이런 인물들을 등용하여 민심의 기강을 다잡는 의도도 있었다.  김집, 송시열 등 인물이 등장한다.  조선이라는 사회가 이념적으로 경직되어 가는 계기가 된다.  사림은 원래 재야에 은거하다 중앙 정계에 진출한 세력을 말한다.   살림도 사림의 한 갈래라고 볼 수 있다.

내용적인 특징을 보면 , 상대적으로 예학을 중요시하는 세력이었다.   특히 17세기에 가면 조선이 예학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이념이 강해지게 된다.  명나라의 멸망으로 소중화 사상도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도 명분론을 강화 했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신권의 강화로 이어지게 된다.   왕과 신하의 이념적 투쟁, 당파들의 이념 투쟁이 필연적으로 야기 되는데 대표적인게 예송 논쟁이다.   

사대부들의 뻔뻔함 , 강성화 및 성리학 강화 등이 구조적인 보수화를 촉진 한. 

살림세력의 등장과 함께 김자점의 대응이 주목 받는다.  청나라에 청을 넣어서 김자점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려한다.   김자점은 청나라를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기 위해 노력한다.   원래 김자점은 인조 반정에 참여 했던 사람이었다.  권력 줄타기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살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를 적극 활용하게 된다.  

 

 청나라에서 다섯 명의 사신으로 오게 된다.   조선의 공주를 요구하게 된다. 미녀 찾기에 분주하게 된다. 정치적 간섭은 약화 됐지만  소소한 요구들이 계속 있게 된다.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간섭은 명나라 초기 보다 극도로 약해진다.  단지 청나라 건국 초기에 큰 충돌이 있었을 뿐이다.

청나라는 만주를 신성시하여, 통행을 불허 한 경우가 많아 조선에 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족들도 함부로 만주를 지날 수 없었다.





 

김자점 일가의 옥사: 처음에 고변이 들어온다. 장인과 김자점이 비밀 왕래가 의심스럽다. 김자점의 아들이 불려 와서 자복하기를 수원부사, 광주부윤 과 모의 해서 선수 쳤다는 내용.  거사 치러서 승성군 옹립하려 했다.   김자점 처형됨.   사실 김자점은 효종의 정적 1호 였다.  청의 입장에서 개입이 없었음이 독특하다. 김자점은 친청파의 거두였기 때문이다. 

 

 

 


효종의 북벌론:  효종은 자기관리가 엄격했다.  왕이 된 후에 평생 금주를 실천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왕이기 때문에 자기 관리가 엄격하였다.  소현 세자빈 강씨 신원의 복권 요구가 나올 때 자신의 위치가 위험해진다.   강빈 옹호는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치부한다.   다른 부분에서는 온화하고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강빈과 관련된 문제는 매우 민감하게 표현한다.   자신의 왕위가 사실은 그녀의 아들에게 갔어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컴플렉스가 오히려 북벌론에 대한 심리를 강화 시킨 점도 있다.  자신의 왕권 계승에 대한 명목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으로 소현 세자와는 반대의 노선을 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념과 명분론이 강한 살림 세력을 포용하는 방책이었을 수도 있다.

모자와 의복문제도 많이 시정하여 군대를 군대 답게한다. 

 

 대동법을 충청도 일대까지 확대 강화하는데 큰 공을 세우며,  국방 강화를 위한 조처도 훌륭했다.    효종의 군사력 강화는 인사 선발 과정에서 들어난다.  용맹함과 슬기로움을 크게 중시했다.

어용 대장 이완 역시 죽을 때까지 효종의 뜻을 따른다.  

나선 정벌 때 조총 부대를 선발하여 흑룡강에 가서 싸움을 벌이는데 이 역시 외부에서 조선의 국방 강화 책의 실효성이 증명된 것이다.  조선 역시 세계사적 무대에 들어오게 되는 일대 사건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의 부대를 원했고, 효종은 북벌 전의 시험 무대로 삼았던 것 같다.

 

 

 효종과 산당:  서인 세력 중에서도 서인 산당 세력이 추진 한 일은 이이나 송호에 대한 문묘 종사 운동이다.   이 일은 학통 문제를 벗어나 정치 문제로 까지 간다.   효종은 서인 정국 일색인 정치 상황알 견제하기 위해 승인을 하지 않는다.  집권 서인 세력은 내용적으로는 송시열의 붕당이었다.   정치적 현실은 없고 이상만 있는 조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송시열은 소현 세자의 정통성을 본심으로 지지 했고, 청나라의 속국의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논리로 왕의 소환을 불허하는 태도를 자주 나타낸다.  

 

송시열과 효종의 독대: 북벌의 가장 유력한 자료로 본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독대란 아주 비정상적인 일이다.  정황상으로 북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송시열을 포섭하는데 북벌론이 유용했을 것이다.  실록에서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송시열은 항상 강조하는 게 내수 즉 안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내부적으로 이념적으로 정비되는 그런 국가를 원했던 것 같다.   송시열 국정의 모티브는 소중화였다.

효종이 죽고 나서 16년이 지난 후에 예송 논쟁으로 유배 될 때 , 송시열의 글이 공개 된다.

송시열이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하지 않았음이 탄핵 사유 였을 때 방어 책으로 내 논 글이었다.

송시열은 글 가운데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만 한다..  그리고  그 글의 맥락에서 효종의 저자세가 나타난다.   효종은 마음이 달아 올라 있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추상적인 말만 한다. 하지만 효종은 분노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송시열의 환심을 사는 말을 많이 한다.  이로 볼 때 효종은 송시열을 자신의 고질적인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아가 사대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지렛대로 활용한 것 같다.    송시열을 북벌론의 정신적 지도자로 잡길 원했으나 송시열은 내수를 주장한다.  나라 안의 정비를 우선 한 것이다.  이로 볼 때 효종은 외로운 싸움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효종은 사실 실제 추진 한 것은 부국 강병이었다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효종에게 사실 최선의 카드는 북벌론이었다.   효종은 사실 소기의 목적을 달성 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무리수 이지만 , 정신적인 포만감을 신하와 백성에게 줄 수 있었다.   송시열 입장에서는 서인 중심의 권력 기반 강화 예학 중심의 국정 장악이 목표였다.  조선은 학자가 관료를 하는 특이한 국가였다.    행정 관료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 태도 자체가 정치인 이런 형태는 조선 후기의 비극이다. 

 

김 육: 소현 세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봉림대군을 인정 안 한다.  하지만 그의 특출한 실력 때문에 효종이 중용한다.  그는 효종대의 간판 스타였다.  대동법 강화에 공이 있으며, 과학 발달에도 큰 도움을 준다.    그는 권력형 관리가 아닌 실질 강건형 관료로서 인재가 부족한 조정에 가뭄의 비 같은 존재였다.  그는 보기 드문 재상이었다.  백성은 원하는 데 수령이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 것을 개탄 하였다.   그의 현실 개혁의지는 오늘날에 국민 주권에도 나타나 있다.

 

 

 

효종은 체구가 매우 컸다.   그래서 죽을 때 관을 이어 붙이고 옻칠을 마흔 번 넘게 해서 이어 붙인 흔적을 가렸다.   효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경황이 없었던 것 같고,  왕권의 약화도 반영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