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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세계사 편력

일본의 풍경 이야기 - 천황제와 일본인의 정체성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천황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여신의 자손이라고 믿는다.

한국인이 단군신화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처럼 , 일본인은 천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최고의 신이고 그에게 제사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천황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미카미를 모시는 이세신궁은 가장 신성시 되는 신도 사원이 되었다.

천황이라는 실제 존재와 신도라는 추상적인 종교를 결합한 상징적인 장소가 이세 신궁이다.

 


최초의 천황은 진무 천황이다.  진무 천황의 실존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님을 일본 학계는 다 인정하고 있다.  그 당시 시대적인 인물의 수명을 본다면 127세 까지 살았다는 진무 천황은 허구이다.

 


에도 시대 말기 존왕 운동이 일어 났을 때 진무 천황을 다시 재조명 하고 쿠데타를 정당화하게 된다. 본격적인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모든 천황의 능을 다 발견하고, 재 단장했다.  진무 천황의 능을 찾아 1890년부터 복원하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있을 수 없는 능을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것으로 변화 시키고 교육시켰다.

 


만세일계라는 의미는 근대에 만들기 시작한 사상이다.  영원히 하나의 계통을 이어온 천황의 순혈을 강조한다.  한번도 쿠데타가 없는 천황제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천황이 실권을 장악했던 시기는 거의 없었고,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시대, 무로마치 시대, 에도 시대에 걸쳐 군정이 일본을 다스려 왔다.  한반도와 중국은 역성 혁명의 논리로 통치자가 바뀌는 걸 정당화 했지만,  일본은 실권과 군주를 구분 시켰다.  천황은 단순한 정치적 권위가 아니라 종교적 권위를 담당했었고, 막부는 정치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만세일계가 허구임이 밝혀 진 것은 남북조 시대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두 명의 천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북조 같은 경우는 막부가 임명하는 허수아비 천황이었고, 남조가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천황은 북조 계열의 천황이다.  남조가 북조에게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세일계가 허구임이 증명된 것이다.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2차 대전 후에 한 남자가 언론에서 자신이 남조 천황의 실질적인 후손이기 때문에 자신이 천황이 되어야 하며, 히로히토는 가짜라고 주장한 일도 있었다.

 





천황 사상 때문에 일본이 신의 보호아래 있다는 신국 사상도 역사 왜곡 중의 하나이다.

 

임나일본부설: 고지끼와 니혼슈키에서는 삼한 정벌론이 언급되어있다.  하지만 8세기에 서술된 내용이기 때문에,  당시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던 시기와 맞물려 근거가 희박하다.  일본은 백제와 친했기 때문에 신라를 하대하고자 허구를 창작했음이 분명하다는 시각이 주류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신라계 유민과 백제계 유민이 대립했을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일본은 또한 발해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가미카제(신풍): 고려와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감행했을 때 태풍이 몰려와 배들이 침몰한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사람들은 신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당시 고려를 일본인들은 구쿠리라고 불렀다.  지금도 구쿠리는 두려움의 대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로 볼 때 일본인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신풍 사상을 내면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상은 2차 대전 당시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로 표출이 되면서 왜곡된 정신세계의 단면을 드러내 주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천황의 관계: 도요토미는 무사 출신이 아니라는 컴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에 막부를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천황을 사용했다.  천황은 그에게 관백이라는 귀족 작위를 주었다.  그래서 도요토미는 관백이라는 지위로 통치권을 행사했다.  반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막부를 세워 쇼군이라는 지위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