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 유일하게 제국주의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때 미얀마의 속국으로 전락할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꼭 평화로웠던 시기만 있었던 건 아니다. 아유타야 시대 때 나레수왕 대왕은 왕자 시절에 미얀마에 볼모로 잡혀 가 15세까지 그곳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레수왕이 태국에 돌아 온 뒤 미얀마가 차기 왕 자리를 놓고 내전이 일어나면서 태국은 다시 독립하게 되었다. 그 이후 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로 확장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미얀마와의 계속된 전쟁으로 멸망하게 된다. 이후 1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톤부리 왕조가 등장한다. 이 때도 미얀마와의 전쟁이 계속 되었기 때문에 톤부리의 탁신 대왕이 신경 쇠약에 걸리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탁신의 친구이자 군사령관이었던 짜끄리 장군에게 처형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1782년에 짜끄리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태국과 중국과의 관계는 수코타이 시절부터 이미 긴밀하게 유지되어 왔다. 태국이 중국에게 조공을 보내기도 했었고, 중국은 무역 사절단을 교류하기도 했다. 미얀마와는 긴장 관계였지만 라오스 캄보디아에게는 항상 주도하는 종주국 관계를 맺어 왔다. 말레이 인도네시아의 말라카 해협에는 그 당시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역항이 있었기 때문에 아유타야는 무역을 중점적으로 키웠다. 서구 열강과 접촉했던 시기도 이 때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포루투갈과도 관계를 맺었다. 아랍인과 인도인들과도 교류를 맺어 왔다. 이 사람들의 당시 목적은 기독교, 혹은 이슬람교의 포교였다. 하지만 큰 진전이 없었기 대문에 아유타야와 서구와의 관계는 크게 발전하지 못한다.
19세기에는 서구 열강이 인도차이나 동남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하려 했기에 태국은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태국은 자구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 결과 태국은 대나무 외교와 근대화를 추진한다.
대나무 외교란 대나무가 바람에 휘어지지만 꺾어지지는 않듯이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주권을 지켜낸 태국 식 외교를 일컫는다. 자주권을 지키긴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에 자국의 영토 일부를 할애해 줘야만 했다. 영국을 효시로 불평등 조약을 총 13개나 체결해야 했다.
국내적으로 많은 변화를 꾀해 근대화를 이루기도 했다.
태국에 가면 차선이 한국과 반대라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영국식 교통 체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라마 4세 국왕이 도로 운하 건설 시작,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재 도입 등 여러 가지 서구식을 추진하면서 미얀마를 통치하고 있던 영국식 제도를 모방하였다.
입헌군주제의 도입: 태국의 입헌군주제는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라마 4세 때부터 근대화 바람을 타고 왕자와 귀족 자제들이 해외 유학을 가게 된다. 해외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라마 6세 때부터는 절대 왕권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라마 7세는 왕의 주도로 민주주의를 도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932년에 소수 민간관료와 군부의 주도하에 헌법을 공표하고 평화적으로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군부 세력: 태국의 군부출신 총리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피분숭크람이다. 1938년부터 6년간 그 다음 1948년 부터 무려 9년간 총리를 맡았던 인물이다. 피분 총리는 민족주의자 또는 국수주의자로 알려져있다. 태국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심을 키우는데 주력을 했던 인물이다. 1939년 그의 주도 아래 국호를 시암에서 태국으로 바꾸게 된다. 중국의 화교들도 태국이름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2차 대전에 일본이 동쪽에서 인도차이나를 먹고 들어오고 있었다. 서쪽에는 미얀마가 영국령이 었기 때문에 중간에 끼게 된다. 태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처음에 태국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했으나, 정세가 바뀌자 태국의 대나무 외교가 빛을 발하게 된다. 피분송크람 총리는 프랑스와의 국경 문제에서 일본이 태국 편을 들자, 친일 노선을 선택한다. 결국 일본 편에 서서 전쟁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총리와 노선을 달리하는 국왕 섭정 쁘리디파놈용 등이 국내에서 반일 운동을 펼쳤고, 일본의 패색이 짙어질 때 이전에 선포된 전쟁이 무효하다고 선언하고 연합군 포로를 석방하는 등 노력하자, 결국 미국의 지지를 얻고 독립국이자 승전국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총리와 왕실이 이중 노선을 취하는 대나무 외교를 통해 불리한 상황을 잘 타개하였다. 줄을 잘 서서 승전국이 된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동남아시아권의 국가들의 독립으로 인해 혼란이 초래 되었다. 이때 태국의 군부세력이 안정에 기여했기 때문에 민중들로부터 암묵적인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군부 정치에 대한 반감도 생겨나서 잠시 민간 정부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군부의 재집권이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대륙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했기 때문에 공산화 위협으로 7~80년대에는 군부독재가 암묵적으로 인정되었던 측면도 있다.
태국의 국왕의 위치: 현재 국왕 라마 9세는 1946년에 즉위했다. 헌법에서는 국왕의 실권을 인정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국왕의 정치 개입이 용인되고 또 그 지시에 따라서 상황이 종료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라마 9세 왕은 즉위 전에 출가하여 오랜 세월 동안 승려 생활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즉위한 이후에는 각 지방을 돌면서 궁핍한 국민들을 직접 찾아가고 그 지역의 발전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법왕 즉 신앙을 겸비한 국왕이라는 온정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정치적 혼란이 있을 때에는 카리스마적인 결단을 내리는 신왕의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68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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