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의 등장: 에도 시대의 정치 구조는 쇼군을 천황이 임명해 주는 것이었다. 형식상 쇼군이 후계자 이름을 적어 주면 확인도장을 찍어주는 식이었다고 한다. 천황이 이러한 권한을 갖게 된 것은 종교적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 말엽에 이러한 정치 구조의 모순이 들어난 사건은 미국 해군 제독 페리의 등장이었다. 쇼군의 정식 명칭은 오랑캐를 무찌르는 장군이라는 뜻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다. 정이대장군이란 천황에게 복종하지 않고 세금 바치지 않는 큐슈지역과 동북지역을 정복하는 일을 하는 관직이었다.
아편 전쟁에서 영국이 청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는다.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무너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막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페리와 화친을 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천황 앞에 도장을 받게 했다. 하지만 오랑캐와의 화친을 하는 쇼군은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기에, 천황의 질책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발생한다. 반막부파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때 천황이 절묘한 판단을 내린다.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 효명천황(고메이천황)이 도장을 찍지 않고 막부에게 반려조치를 내리면서 오랑캐와 싸우라는 명을 내리고 그와 동시에 반막부파에게는 막부를 중심으로 싸우라는 절묘한 방침을 내린다. 이러한 중재안을 내놓으면서 정치 밖에 있었던 천황이 어느 순간 정치의 중심으로 복귀하게 된다. 반막부 세력은 호재를 만났다 여겨, 오랑캐를 무찌르고 천황을 모시자는 존왕양이 운동을 벌이게 된다. 1868년에 드디어 메이지 유신이라고 알려진 왕정복고가 성공하게 된다.
실권을 장악한 유신 세력들은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는 천황이 다스렸던 고대의 질서를 복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민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천황을 대중친화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황이 전국을 순행하면서 민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활동을 한다. 이때 전통복을 입지 않고 군복을 입고 순행하여, 민중들에게 부국강병과 근대화를 추진하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야스쿠니 신사와 천황: 야스쿠니는 2차 대전 전몰자만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막부파와 천황파 사이의 내전에서 죽은 사람들부터 모시기 시작했다. 일종의 국립묘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제 될게 없다는 것이 일본정부의 주장이다. 하지만 전범들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야스쿠니는 천황의 신격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아직도 일본은 천황제를 고수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전쟁의 종결을 천황이 가져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를 '종전의 조서'라고 한다. 천황이 주체가 되어 전쟁의 참화를 끝냈다는 것이다.
항상 군복을 입고 흰말을 탄 모습으로 대중에게 나타났던 천황이 종전 이후에는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일반인들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영하여 대중들에게 친밀히 다가왔다. 또다시 전국을 순행하며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문민 군주로서의 모습을 각인 시킨 것이다. 일본 왕실의 역사는 정말 아이러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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