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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왕조실록-고종 실록/ 대원군의 실각과 일본의 정한론 및 운요호 사건

고종 5년 때 최익현이 여러 가지 폐단을 지적하며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 10년 때 최익현이 다시 올린 상소로 인해 대원군이 실각한다.  경복궁 중건의 폐해도 거론되었다.

대원군의 공식적인 직위는 없었다.  비공식적인 권력의 한계가 있었다.   고종의 나이도 변수가 되었다.  20살이 된 것이다.  같은 시기 18살 청나라 동치제는 친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고종이 사실은 공식적으로 친정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실권이 대원군에게 있어서 실질적으로 친정이 아니었다.  명성왕후 민씨가 대원군을 견제했던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된다. 

 

대원군 개혁의 평가: 그의 개혁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전광석화처럼 오래된 폐단을 처결했다.  리더십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시기가 좀더 일찍 있었더라면 고도의 개화를 성공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개혁의 성과가 쇄국 정책으로 크게 바래게 된다.  대원군의 너무나 조급한 성격도 아쉽다.  경제 관념이 전무해서 당백전을 발행했다는 것도 그의 한계였다.  쇄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부국강병책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 당시 쇄국은 흥선군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보편적인 공론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개항이 더디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외세 열강이 보았을 때 시장으로써 매력이 없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에 통상을 끈질기게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중전 민씨: 대원군의 결정으로 고종의 정비가 된다.  1866년 혼례식이 있었을 때 운현궁에 있었을 정도로 대원군의 영향력이 컸다.   여흥 민씨 집안을 선택한 것도 세도가문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민씨는 영민하고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대원군은 실각한 후 중전 민씨에 대한 반감이 커지게 된다.

 


최익현: 대원군의 실각을 초래한 상소를 올린 선비이다.  고종의 속마음을 잘 대변해주었다 판단했기에 고종은 그를 지지한다. 물론 이 상소로 최익현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지만 대원군 역시 권력을 잃게 된다.  최익현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일 년 후 다시 해배되어 돌아온다.  대원군은 몹시 서운하게 생각했다.

최익현은 전형적인 유학자로서 대원군의 서원철폐, 및 호포법에 불만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척사와 관련해서는 대원군과 뜻을 같이한다.   

 




친정에 나선 고종: 나름 대로 고종이 주도적으로 다스리지만 , 전반 적인 기조는 대원군과 맥을 같이한다.  민씨 세력도 대거 커지지만 고종은 나름대로 단호하면서 세련되게 정국을 운영한다.  인사정책도 아버지와 비슷하다.  대원군과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영의정으로 올리지만, 대원군 세력들도 계속 등용한다.   대내적으로 대원군과 다를 바 없는 정책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많이 달라지게 된다.  

 

중전 민씨 친정: 중전의 친정어머니가 폭사를 당하여 죽는 참변이 일어 난다.  대원군이 저지른 짓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된다. 하지만 대원군과의 연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대원군과 민씨의 반목은 민중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시각이 된다.  

 


운요호 사건: 일본에서는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메이지 유신이 단행된다.  1868년에 메이지 천황이 옹립되고 1875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 난다.  일본은 열심히 서양문물을 배워서 근대화 개혁을 진척시킨다.   서양 세력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회수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애도시대에 쌓은 부를 바탕으로 유신 세력의 참신함을 성공적으로 수용하여 막강한 국가로 발돋움 한다.  그리고 서양에게 침탈당한 손실을 조선과 만주 침공으로 만회할 수 있다는 정한론이 대두된다.   일본은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무력 시위를 벌인다.  미국이 페리를 앞세워 일본을 개항했듯이 강화도에 운요호를 앞세워 개항을 요구한다.   일본군이 상륙하여 살륙을 행하고 일단 돌아간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와서 조약을 강행한다.  1876년 마침내 조일 수호 조약이 체결된다.  일명 강화도 조약이다.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미명을 내세우며 조선의 측량권을 받아 간다.  이후 측량 활동 중 광개토 대왕비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조선 침탈을 위한 중요한 정보로도 활용이 된다.    강화도 조약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최익현은 이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흑산도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최익현은 의병활동을 하다가 대마도로 끌려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