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등재 된 조선왕조실록은 철종까지이다. 태조실록부터 철종 실록 까지는 사고에 저장되어 한 세트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고종, 순종실록은 따로 창경궁에 있는 장서각에 보관되었다. 비록 일본의 주도아래 편찬됐지만 우리나라 사관들이 쓴 사초를 기초로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고종, 순종실록도 포함된다. 국보나 세계기록 유산은 공식적으로 태조부터 철종까지이다.
신정왕후의 결단: 신정왕후 조 대비는 1863년 흥성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왕으로 삼는다. 흥성군은 대원군으로 봉해진다. 세도가의 전횡으로부터 왕실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조 대비와 흥성군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신정왕후는 흥성군과의 개혁 파트너라고 할 수 있다.
고종은 철종이 아니라 신정왕후 남편 익종(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고종이 즉위 후 잠시 수렴청정을 했다. 안동 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신정왕후는 처음에 고종의 나이 조차 몰랐다고 한다. 순전히 흥성군에 대한 신임으로 결정된 대권이었다. 고종이 15살 친정을 시작한 이래 신정왕후는 정치적 술수를 쓰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남연군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남연군 조차 왕가에서 멀리 떨어진 종친이었다. 뿌리를 따지면 흥선군은 영조의 후손이었지만 종친으로서는 거리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왕실에서 왕을 할 사람이 별로 없는 상황을 눈치챈, 흥선군은 자신의 집권 계획을 추진한다. 물론 사전에 조 대비와의 사전 교감을 통한 밀약이 있었다. 흥선군은 종친으로서 야사에 묘사된 것처럼 한미한 집안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벼슬을 수행했고, 궁에 출입하며 조 대비를 만날 수 있었다.
집권한 흥선군은 인사정책을 포괄적인 연대 방식으로 선택한다. 대형 옥사를 통해 안동 김씨를 숙청하지 않고, 일단 그들과 합동연횡을 한다. 물론 안동 김씨를 완전히 제압한 상황에서, 그들의 정책 지지를 얻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흥성군의 탁월한 정치 감각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왕실의 위상 회복을 위해 , 종친들의 정계 진출을 활성화한다. 종친이 이때 만큼은 견제의 대상이 아니었다. 세도가의 독주를 차단하는 왕당파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비변사에 대한 개혁: 고종 1년 집권 초기부터 비변사의 폐단이 거론된다. 비변사가 사실상 왕권을 능가하는 세도가 권력의 거점이었다. 비변사의 권한을 의정부로 넘겨버리고 완전히 혁파해버린다. 비변사는 일종의 국가안전보장회의였지 행정부가 아니었다. 의정부의 모양새가 이때 다시 제대로 갖추게 된다. 정도전을 복권시킨 사람도 흥선군이다. 정도전이 생각한 모델을 되돌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양반의 군역: 양반들에게도 군역 의무를 지우게 하는 개혁이다. 군역의 폐단은 영조 때부터 심각한 것이었다. 영조 조차도 양반 군역을 실시하지 못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와 같은 탁상공론이었다. 흥선군은 이를 과감히 시행한다. 양반들도 군정에 등록되면서 호포법이 제대로 실행되게 된다.
환곡 개혁: 수령과 별도로 환곡을 사창제도로 개혁을 하여 수령의 가렴주구를 차단하였다.
서원철폐: 서원은 사림들의 본산이었고, 백성들을 매우 세련되게 수탈하는 서원은 사대부 체제의 근간이었다. 그래서 흥선군은 신중히 접근한다. 그래서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만동묘를 먼저 철폐한다. 그리고 사액 서원 중에서도 47군데를 뺀 나머지 서원들을 철폐하여 국가세수를 늘리는 획기적인 성과를 올린다. 일반 백성들은 크게 환영한다. 유생들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공자가 살아와도 백성을 괴롭힌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라며 흥성군은 강행한다.
경복궁 재건: 형식상으로는 신정왕후의 명 아래 실행되지만 , 흥선군의 의지로 시행된다. 흥선군은 기부금을 거뒀고, 당백전을 발행했다.
쇄국정책: 척사와 쇄국이 연계 되어 서양 세력을 배격한다. 당연히 천주교 탄압도 일어난다. 병인박해로 몇 천명이 죽게 된다. 사실 프랑스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와 통교하는 것은 조선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과 통교하는 것이 조선에게 유익했을 것이다. 일본만이 조선 영토에 대한 야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프랑스교구가 되어있었다. 이 박해로 큰 카드를 잃어버린 것이다. 병인박해로 프랑스의 보복 병인양요가 일어난다. 이후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한 보복으로 미국의 신미양요를 당하게 된다.
남연군 묘 도굴사건: 흥선군이 통상요구에 응하게 할 볼모로 사용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시도하다 실패한 사건이다. 오히려 흥선군의 분노를 사 쇄국책이 더 강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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