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0년 세자로 30년을 지내고 경종이 왕이 된다. 그는 3살에 세자 책봉이 됐기에 33살에 왕이 된 것이다. 경종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가시 방석에서 보낸 세자 생활이었다. 소론은 비교적 소수였고 노론 정국이었다. 소론 임금, 노론 집권이었다.
즉위 후 장희빈의 신원에 대한 주장이 제기 되지만 노론의 공격을 받게 된다. 장희빈의 잘못을 정확히 재 규명하라고 상소를 올린 자는 석방 시키고, 신원을 주장한 자는 처벌을 받는다.
후계자 책봉 논란: 경종의 나이 아직 젊은 나이였고, 왕비 나이 아직 십대(17살) 소녀였기에 사실 이러한 노론의 주장은 오만한 전횡이었다.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은 노론의 힘을 업어 세제가 된다.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대비의 압력에 못 이겨 책봉한 것이었다. 심지어 세제의 대리 청정요구까지 한다. 소론은 이에 반발한다. 경종의 왕권의 실추를 대변한 사건이었다.
소론 최석항: 최석항은 경종을 대면하고 국정의 대소사를 세제에게 다 맡기는 것의 부당함을 건의한다. 결국 경종은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려 한다. 노론도 너무 정치적 부담이 커졌다 여겼고, 연잉군도 명을 거두어줄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왕의 정치 생명을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인 무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경종이 보인 태도는 굉장히 드라마틱한 일이었다. 모든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정적들이 스스로 정치적 위협을 자초하게 하고, 궁지로 몰아 그들이 큰 무리수임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들의 실수를 유도한 것이다. 때마침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의 상소가 올라온다.
경종의 반격: 소론 조태구를 영의정으로 최석항을 좌의정으로 임명하여 정국 쇄신을 시도한다.
목호룡의 고변: 경종 시해 역모를 고변한다. 독살의 방법이었다. 실제 증거도 나온다. 이로 인해 신임사화가 일어난다. 4대신들과 노론의 세력이 숙청된다. 하지만 경종은 왕 세제를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경종은 자신이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장애를 인식하고, 정치적 부담을 면해야 했었을 것이다. 어쨌든 왕실의 후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노론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경종의 사망: 그의 급작스런 죽음은 독살설이 유력하다. 그는 죽기 전에 극심한 정치적 스트레스를 겪었다는 정황이 사관들의 기록에 남아있다. 경종은 자신의 정치적 반대세력의 영수인 이복동생을 미워했지만 사적인 감정을 누르고 끝까지 지키는 대기의 태도를 나타냈다.
경종의 통치: 즉위 전 후 모두 힘든 상황에 처했던 왕이었다. 자녀도 없었다. 불운한 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짦은 재위기간 동안 과도기적 역할을 충분히 해낸 왕으로 평가 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유한 이미지로 기억되지만 결정적인 순간 아버지 숙종 못지 않는 환국을 단행할 수 있는 결행력도 있었던 왕이었다. 숙종과 영조의 긴 통치 기간의 가교 역할을 잘 수행한 왕이다. 마치 청나라 강희제와 건륭제의 긴 제위기간 중간에 가교 역할을 잘 소화한 옹정제에 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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