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 시큼하게 발표된 새 포도주
인류의 모든 문제가 정치에 기인한다고 볼 수 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맑은 기풍이 진작되어가는 현장의 중심에서 생업을 일구며 소박한 나날을 보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태고적 소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의 사회 발전을 헤겔의 변증법이나,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한 큰 틀의 구조로 긍정적인 미래상을 마음에 품도록 교육받아 왔고 길들여져 왔다. 민주주적 발전 모델이든 , 사회주의적 발전 모델이든 , 기본적으로 이념의 향배는 동일하다. 이것이 힘있는 자의 편의성을 위한 길들이기 인지 아니면 무한한 긍정의 나래를 펴고싶은 인간본성의 호소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어찌 됬든 우리는 이타적이고 교양있는 이웃들로 둘러싸여 있는, 매사에 합리적이고, 온정적인 정치 사회 중심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정치 상황은 왜 항상 이토록 소아적인 발상으로 가득차 있을 까? 뉴스 보도 매체를 아이들과 함께 보는 것이 부끄럽다. 차라리 어린이 TV프로가 훨씬 건전하고, 온정적이며, 합리적이고, 이상적이다. 과연 19세 이하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영상물이 청소년 관람가 등급의 영상물보다 수준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성인이 되면 투표권이 주어진다. 이는 곧 의식의 자립과 자제의 사회적 인증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헌정질서를 새우고 삻의 터전을 일군다. 우리는 그것을 사회 계약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희대의 찬사였다. 권리장전, 명예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독립전쟁 등등은 민주발전의 현란한 운무라 생각했고, 우리는 그 수혜자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현실은 과연 그럴까?
우리가 과연 사회의 주체이기나 한 것일까? 투표를 한다고 주체인걸까? 리모컨을 누른다고 텔레비젼의 주체적인 사용자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현란한 자기 기만의 영상을 끊임없이 갈망하도록 조건반사적으로 길들여 지는 것일까?
야바위와 예술은 공통점이 있다.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미혹이라하고, 후자는 감상이라한다. 전자는 한탕주의적인 현실외면이 도사리고 있고, 후자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정서적 안온함이 있다. 둘다 안목의 정욕를 기반으로 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각각 산출하는 결과는 이토록 극명한 것이다.
투표 용지는 과연 카지노에 들어가는 입장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미술품이 있는 갤러리의 입장권이 될 것인가?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달려있다.
분명 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정치체계이다. 피 흘림의 과정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사용설명서는 주로 근대화를 먼저 일군 서방국가들이 작성한 것이다. 그 사용설명서의 감수에 우리는 참여한 적이 없다. 그리고 주변 열강의 이전투구에 의해서 북한 주민을 제외한 남한 사람들에게 먼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을 때 온갖 역사적 미사여구로 가득한 스펙사항이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억하자. 면도칼이 아기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어른에게는 유용한 선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