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집권기는 세계사적으로도 격변기였다.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며,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이 있었다. 시민 세력 대두의 시기였고, 계몽주의의 시대였다. 중국은 강희, 건륭의 마지막 시기였다. 유럽은 해외 영토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의 심화로 식민지 경영이 시작된다. 조선은 대외를 수용하는 면에서 매우 뒤처졌다. 일본은 난학 즉 유럽을 배우고 받아들인다. 조선의 실학자는 관직에 없었고, 재외 학자로 활동하여 공염불이었다.
정조의 노력: 정조는 탕평책도 쓰고 지방 세력을 끌어들이려 노력한다. 하지만 노론세력의 공고화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학문에 대한 저변 확대를 노렸으나, 관직의 제한과 응시생의 포화로 많은 모순을 겪는다. 군포, 군역, 공납, 환곡 중에 환곡의 폐단이 심화 된다.
정조의 민본정책: 정조는 완벽한 군주상이었다. 총명했고, 신체가 건강했으며 애민의 정신이 확고했다. 암행어사를 활용을 잘했다. 심지어 어사들에게 구체적인 과제를 지시한다.
금난정권 폐지: 자유 상인들의 성장이 활발해진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시전 상인들만이 독점을 하고 있었다. 남인 정승 채제공은 독점판매의 폐단을 지적한다. 도성에서의 물가 조절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경유착도 심했다. 국가에서 필요한 유기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정권을 폐지한다. 신해통공이었다.
서얼 허통: 규장각을 설치하고 서얼 출신 중 인재들을 발탁하여 중용한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사노비가 폐지 되지만 정조는 이러한 문제에도 이때 관심을 갖는다.
정조의 체력: 날마다 49발의 화살을 쏜다.
개혁 군주로서의 정조: (비평적 입장)정조는 사대부의 나라를 꿈꿨던 왕이었다. 그리고 실학적인 움직임을 배격하고, 문체반정을 시도했던 왕이었다. 준론 탕평을 주장하며, 당파의 강화를 오히려 주도했던 측면도 있다. 실학보다는 성리학을 강화 했다. 그러므로 그의 개혁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왕권 강화책으로 수원성을 건설하고, 장용영의 내용영은 자신의 친위대로 외용영은 화성을 지키게한다. 규장각을 자신의 비서 및 도서관으로 쓰려한다. 사실 비서는 도승지였고 도서관은 홍문관이 이미 있었다. 시대적 과제에 부흥하는 개혁 군주였느냐는 것은 회의적이다.
(긍정적 입장)하지만 학계에서는 정조를 개혁군주로 보는 성향이 강하다. 성리학에 정통했지만 그것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을 추구했다는 지표가 많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정약용 같은 진보적인 선각자를 인정해주었던 왕이었다.
정조의 후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은 없었다. 수빈 박씨와 사이에서 난 자식이 순조였다. 대안이 없어서 그를 책봉하고 동시에 혼례식을 했다. 순조의 장인 어른은 김조순이었다. 그는 대표적인 시파 출신이었기에 믿음직스러웠다. 정조의 반대 세력인 노론 벽파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순조가 왕이 되고 나서 혼례가 성사 된다. 하지만 정조의 바램과는 달리 세도 정치의 포문이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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