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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왕조실록-중종, 조광조 없는 국정, 영혼없는 왕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신임: 중종은 무신들의 일 및 국방에 대한 일들 까지도 조광조에게 묻는다.

성리학의 실천 이념이 소학이다. 조광조는 소학을 매우 중시 했다. 소학 보급에 힘썼으며, 심지어 지방 자치를 성리학적인 이념으로 설계하기 위해 향약 자치 규약을 만든다.  향약은 서원과 함께 사림의 지위를 탄탄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현량과: 오늘날 입학 사정관제와 같다.  천거를 통해 면접을 보고 책문이라는 문제를 주고 통과하면 선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제보다 객관성이 부족한 시험 제도였다.  인맥을 통한 대거 등용이라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과거제가 시험에만 특화된 인재만을 뽑기 때문에 진정한 관리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소격서 폐지: 중종은 소격서 폐지와 관련해서는 조광조와 충돌하게 된다.  철저한 유교주의자였던 조광조는 도교의식을 행하는 관청을 참을 수 없어 했다.  중종은 결국 폐지하지만 아쉬워 했다.

 

훈구파와의 대립: 조광조가 추진하는 개혁들이 훈구파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게 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정국 주도를 하려 하고, 왕을 능멸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탄핵한다.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조광조와 그 세력들을 내친다.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조광조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중종의 뜻 밖의 변심에 많은 신하들이 당황하게 된다.   조광조는 도저히 납득을 못했다.  그는 중종이 친히 국문해 줄 것을 탄원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사약을 받게 된다.   실제로 조광조가 역모를 꾀할 사람이 아님을 모든 사람은 알고 있었다.   조광조의 죽음과 함께 그의 개혁이 물거품이 되고 현량과는 폐지 된다.

 

기묘사화의 의의:  결국 사림파의 패배로 끝이 났지만, 순수한 성리학적 이념을 제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최초의 움직임으로써 높이 평가할 만하다.  

 

조광조의 죽음 이후: 남곤은 조광조의 탄핵에 앞장 섰던 자였지만  유학자로서 그의 본분에 대한 자각이 조광조의 죽음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한다.  중종 후반에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위해 중종이 신임했던 인물은 정광필이었다. 그는 14년 정승생활 중 11년간 영의정을 수행한다.  그는 할 말을 끝까지 하는 면에서 참된 영의정이었다. 이후 김안로와 같은 권신이 있을 때에도 그는 균형을 확고히 유지 했다.  





 

김안로의 등장: 중종의 3번째 왕비 문정왕후가 경원 대군을 낳는다.  김안로는 문정왕후를 폐위하고 그녀의 오빠들을 제거하려 획책한다.   하지만 윤씨 일가의 고변으로 김안로 세력은 조광조처럼 축출 당한다. 중종 후반의 정국은 권신들의 대립이 특징을 이루게 된다.


 (사진출처:korea.kr)

 

대장금: 장금은 궁중 의녀였다.  그녀는 중종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를 치료했던 궁녀였다.  중종의 임종까지 지켜 보았다고 한다.  실록에서 장금처럼 주목할 만한 대목을 넣은 궁녀는 드물다. 



 

서경덕: 그는 스스로 깨닫는 학문을 중시한 선비였다.  이황과 이이는 그의 독특한 학풍을 높이 평가했다.   서경덕 제자 중에 박순은 서인의 영수가 되며 허엽은 동인의 영수가 된다.  

서경덕과 황진이의 스캔들은 장안의 화제였다.

 

중종에 대한 평가: 사관들의 공통된 의견은 우유부단함이다.  리더십이 없는 왕의 시대에 나타는 정국의 파행성과 후퇴를 볼 수 있다.  반정으로 형이 쫓겨 난 것을 본 왕이었기 때문에 신하를 믿지 못하고 무서워했다.  조광조를 제거하거나 김안로를 제거할 때 중종이 취한 행동은 미스테리할 정도이다.   중종은 긴 제위기간에 비해 저평가된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