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반정의 3인 방: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훈구 세력이 반정을 주도한다. 사실 성희안만 빼고 그들 모두가 연산군 측근이었기에, 사실상 청산 대상 자체가 없어져버렸다. 반정 이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신원하고, 연산의 만행을 복구하지만 , 반정 세력의 개혁의지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원래 특권 세력이었다. 명분 상으로는 반정이었지만 내용상으로는 단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유자광 같은 검증된 간신들이 말을 갈아타고 공신으로 올려지는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연산 이전으로 복귀 즉 유교 정치로의 회귀만으로도 큰 성과로 받아들여졌다.
중종은 왕이 된 직후에는 힘이 없었다. 반정 공신들이 부인을 내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중전 신씨는 폐위된다. 무분별한 공신 책정도 왕의 무력을 반영한다.
유자광: 대간들의 타겟이 된 유자광은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는 변신의 귀재였고, 권모술수의 대가였다. 그는 서자 출신이었다.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정치적 책략, 및 승부사로서의 기질이 뛰어났다. 그는 오로지 자기 출세에 몰두한 사람이었다. 출신 배경이 비천하였기에 그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사림 입장에서는 그는 간신의 대명사였고, 결국 언젠가 그의 비수가 자신들에게로 향할 거라는 두려움이 그를 탄핵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중종: 연산의 이복 동생이다. 왕이 된 후에도 그는 신하들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갖고 살았다. 성종 임금처럼, 중종도 신하들에게 저자세를 보이는 군주의 형태를 보인다. 신하들의 요구를 거의 수용한다. 세종이나 성종은 가끔 화를 보일 때도 있지만 중종은 화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39년 동안 가늘고 길게 왕위를 유지한다. 여색을 멀리 했고, 연회도 자제 했다. 연산이 했던 잘못은 반복하지 않았다. 유약하면서, 음흉한 정치가였다.
삼포왜란: 태종,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침입은 없었다. 하지만 중앙 정치의 리더십 부재가 생기면서 왜란이 발생하게 된다. 부산포, 제포, 영포 등지에서 일어난다. 국방력 약화의 징조였다. 하지만 삼포왜란은 수월하게 제압이 된다. 중앙군이 아니라 전라도 지방군만으로 올린 개가였다.
자연재해: 중종 때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한다. 심지어 지진도 발생했다. 신하들은 왕의 부덕의 소치라며 중종을 타박할 구실로 삼았다. 중종에게는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중종 초기: 반정 주역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자연사하게 된다. 무신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문신 중심적인 정계 상황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문신들은 확대하여 역모사건으로 규정한다. 고변자는 노비였다. 고변의 신빙성이 부족했다. 역모가 아니라는 해명은 앞뒤 정황이 잘 맞았다. 하지만 수용되지 않는다.
장경왕후 윤씨: 아들 원자를 낳고 산후 병으로 죽는다. 그는 후궁 출신에서 계비가 된 왕비였다. 그녀가 난 아들이 이후에 인종임금이 된다. 폐비 신씨의 폐위를 요구한 반정 대신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온다. 공신들에 대한 도발이라는 이유로 상소 올린 자는 추문을 받고 처벌을 받게 된다.
조광조의 출현: 조광조는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한 직후에 조정의 주목을 받는다. 그는 출중한 인재였다. 그는 대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대간들을 비호했다. 상소를 올린 대간을 처벌하면 조선 언로가 막힌다는 그의 주장은 그의 배포를 엿보게 했다. 그는 성리학 원칙 주의자였다. 그는 의관도 반듯했고, 품행이 단정했다. 중종은 그를 신임하게 된다. 조광조는 성리학에 밀착한 왕도주의를 재창한다. 중종은 그의 이론을 몹시 좋아했다. 반정세력에 짓눌려왔던 중종의 비감을 위로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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