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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왕조실록-선조 왈.. "임진왜란의 일등공신은 명나라"(?) 피눈물 나는 이순신.

 세종과 문종 때 화포가 많이 개선 되었다.  임진왜란 때 화포의 활약이 매우 크다.

제일 고전한 이유는 일본의 조총 때문이었다.  그래서 화약무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  화차,총통 등이 대거 사용된다.  경주성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되고, 왜적의 공성전에 대응하는 데 큰 효력이 있음이 증명된다.  화포 쪽에서는 조선이 확실한 비교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일본은 단지 개인 화기만 우수했다. 

 

 진주성 전투: 굉장히 입체적인 전투였다.  조선의 무기 체계도 잘 정립이 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이다.   6일 동안 밤낮 없이 싸웠다.  적들은 무수한 시체만을 남기고 퇴각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이 이때 전사했다.   이 전투로 조선의 전투력이 만만치 않음이 증명되었다.  이로 인해 명나라 군사들의 지원이 본격화된다.

 

(이미지출처:일베저장소)

 명의 파병: 형식적인 파병은 해놓고, 일본과 협상하는데 열을 올린다.  처음 만나자 마자 일본과 명은 50일간 휴전을 한다.  명나라는 조선에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명조의 만력제는 너무나 무능한 황제였다.  단순히 요동을 방어하기 위해 온 목적이 컸다.  조명 연합군은 나중에 처음으로 평양성을 공격한다. 고니시 일군이 여기 패퇴한다.  고니시는 서울에 총 집결한다.  

 

 행주 목사 권율:  2000여명을 이끌고 행주 산성에 들어가 서울 탈환을 준비한다.  권율 장군의 정세 판단은 조명 연합군이 서울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싸우지 않았다.  결국 3만 여명의 왜군은 행주산성을 집중 공격한다.  도원수 권율은 기적적으로 방어해낸다. 행주 전투는 전쟁의 전체를 결정짓는 사건이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일본이 적극적으로 협상을 타진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단계적인 퇴각 명령을 내린다. 명나라 군사는 권율장군의 추적 작전을 제지했다고 한다OTL 일본군은 풍악을 울리면서 여유 있게 퇴각을 한다. 일본은 강화사 파견을 주장한다. 

 

 2차 진주성 전투: 일본의 10만 대군은 다시 진주성을 공격한다.  조선의 장군들도 진주성에 집결했다.  1차 전투에는 곽제우도 합류했지만 2차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곽제우의 판단에는 전황이 불리하기 때문에 병력을 보전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3천 여명의 조선군과 6만 여명의 민간인이 함께 싸웠지만,  일주일 만에 진주성이 무너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전원 학살이 벌어진다.  논개의 이야기도 이 때의 사건에 근거를 둔다.  일본군은 이미 큰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진주성에 남아있지 않고 퇴각한다. 조선 군이 부산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강화논의 전개: 조선은 협상 테이블에 끼지 못하고 명나라와 일본이 일방적으로 논의 한다.  일본은 조선의 반을 지배하겠다는 요구를 한다.  조선과 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요구였다.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고니시의 희대의 사기극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항복을 받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표면상으로 항복을 하는 것처럼 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책봉하라는 요구였는데, 사실 고니시가 명과 도요토미 둘 다에게 사기를 한 것이다. 일본 측과 명나라 모두 상대가 항복 한 것처럼 조작을 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책봉사가 찾아 오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니시의 사기극을 눈치채고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명나라 역시 분노하며 엉터리 협상을 한 심유경을 죽인다.

 

 원균의 시기: 원균은 조정에 이순신을 참소 하였다.  선조는 원균의 손을 들어 주었다.  원균이 고니시를 도운 셈이었다.  선조의 출전 명령에도 이순신은 일본의 함정을 간파하여 출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이순신은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원익, 유성룡은 이순신의 입장에서 이순신을 비호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특히 북인의 영수 이산해가 원균을 치켜세우며 이순신을 폄하하는 정도가 심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혁혁한 공로가 자신의 입지를 축소시킨다 생각했으며, 의병의 공은 있으나 명나라의 원조가 결정적이었다는 궤변을 일삼는다.  이순신은 사탈관직되서 백의 종군에 들어서게 된다.  이순신을 대신해 부임한 원균은 이순신과 다르게 부하들과 작전 회의를 하지도 않았고, 첩을 들여 희희낙낙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부산과 울산, 순천에 왜성을 쌓아놓고 계속 주둔 중이었다.  왜성이 워낙 견고해서 싸울 방법이 없었다.  이순신이 쌓아 올린 몇 백 척의 수군을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깡그리 궤멸 시켜버린다. 원균도 죽어버렸다.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권율 수하로 백의 종군 하던 이순신을 다시 발탁한다.  애초에 이순신이 출전을 거부했던 이유는 왜성이 워낙 견고했기 때문이었고, 전례 없이 강해져 버린 조선 수군을 보존 시킴으로써 일본이 준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칠천량 패전 이후 조선의 민중은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다시 돌아온 이순신은 동분서주하며 패잔병을 수습하고 12척의 배를 되찾는다.  이순신은 자신이 공들여 기른 부하들과 배들을 잃은 아픔을 이겨내면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수행한다.   이순신은 기적적으로 13척의 배로 300척의 왜군을 격파하는 명량 대첩을 치른다.  

 





 일본의 전황: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어린 아들 히데요리가 쇼군 직을 대신 수행한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다시 쟁패하고 새로운 쇼군으로서 조선 왜군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다.   절망에 빠진 일본군의 저항이 너무 심해 조명 연합군은 큰 패배를 당하게 된다.   명나라 장수 진린은 이순신에게 일본군이 순조롭게 철수 하도록 돕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완강히 반대하여 진린이 결국 이순신과 함께 배수를 치고, 노량 대첩을 벌인다.

노량 대첩에서 이순신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죽게 된다.  끝까지 진두지휘 했음을 엿 볼 수 있다.

 


 선조의 전후 처리: 선조는 중국에 모든 공을 돌린다.  공신 선정을 할 때 자신과 함께 의주에 가서 중국에 도움을 청한 신하들을 높이 평가한다.  선조는 모든 잘못을 자신의 백성에 돌리고 자신을 탓 하지 않는다.  짱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