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 후 새로운 서인 정권이 등장한다.
민심 수습책으로 당파성이 거의 없는 남인 오리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그는 명망이 높고 청백리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조 반정 후의 상황에 대해 안심을 했다고 한다.
실세로는 당연히 인조반정의 주체인 이귀, 김유, 최명길이 인사권을 장악한다. 김자점, 이시백, 심기원이 고속 승진을 한다. 또 다른 반정에 대한 대비를 명분 삼아 국비를 쓰면서 사병을 거느린 세력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귀는 성격이 너무나 과단하고 급했기 때문에 임금에게 신임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유에게 많은 힘이 실리게 된다. 김유가 결국 총사령관이 된다.
인조의 집권 과정: 인조 반정의 명분은 광해의 패륜이었다. 인조는 차별성을 기하기 위해 약간의 유화 정책을 펼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의 탕평책을 펼치기도 한다. 청나라의 눈치 때문에 광해군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를 제주도로 유배를 보낸다. 명에 대한 의리와 사대를 지나치게 강조 했는데, 이것 역시 광해의 외교 정책과 차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성리학적인 유교질서 회복, 친명배금 정책, 대규모 토목 사업 금지를 했다. 결국 이것이 변란을 불러오게 된다.
이괄의 난: 무장이 반란을 일으켰다. 서울까지 점령했고 왕은 공주까지 피신을 가야만 했다.
이괄은 불만이 쌓여 있었다. 반정 성공 후 논공행상을 할 때 이괄은 좌천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이괄의 역모에 대한 고변은 있었다. 인조는 이괄의 아들을 우선 체포한다. 사실 이괄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우발적으로 본격 개입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 되어 갔다. 이괄은 반정 총사령관이었다. 하지만 조정에 끈이 있는 문신들이 주로 일등 공신을 차지했고, 자신은 이등 공신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실망을 했다. 심지어 조정이 이괄을 기찰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괄의 아들이 분노한 나머지 과격한 언사를 하였던 것이 포착 되어 그를 체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 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괄은 참을 수 없었다. 인조의 이러한 처사는 정치적 감각이 부재 했음을 알려준다. 이괄은 파죽지세로 한양에 입성한다. 백성들은 크게 환영을 했다. 선조의 아들 흥안군은 일시적으로 한양에서 왕으로 추대된다.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총사령관은 장만 장군이었다. 진압군에게 유리한 지형과 바람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진압하였다고 한다. 반란군은 너무나 기획력이 없었다. 너무나 쉽게 서울을 점령했지만 반란군의 내분 때문에 이괄이 죽게 된다. 결집력이 부족했다.
정묘호란 발발: 누르하치는 사망하고, 청 태종(홍타이지)이 즉위한다. 그는 중원을 제패하려한다. 중원을 제패하기 전에 조선을 중립화 또는 무력화를 시켜야 안심이었다. 후방의 안전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비중화세상이 역전하는 상황에서 사대주의가 화근이 된다. 사실 청태종은 조선을 병합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후방을 다지기를 원했다. 그에게 때마침 조선이 허술하다는 정보가 오게 된다. 그는 3만 명을 이끌고 조선에 오지만 전격적으로 한양으로 가지 않는다. 이것을 볼 때 그들은 단지 조선의 인정만을 받기 원했음을 알 수 있다. 홍타이지의 군은 사실 정벌 보다는 조선과의 화친이었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은 인조에게 사실 정황을 잘 설명한다. 일부 조선의 강경파들은 후금의 사신으로 온 유해와 강홍립을 목 베자는 위험한 발언을 한다. 하지만 결국 화친이 이루어지고, 후금은 철군한다.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철군 과정에 조선에서 약탈과 인간사냥을 일삼았다.
병자 호란: 조선은 급박한 국제 정세 속에 어이 없게도 원종 추승 문제로 신하들 사이에 소모전을 한다. 청의 홍타이지가 중원의 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단계를 밟아 나간다. 국호를 금에서 청나라로 바꾼다. 조선은 냉정을 잃고 청나라와 일전을 불사르려는 태도를 보인다. 인조 14년 병자년 겨울에 최명길의 예상대로 강물이 얼자, 빠른 속도로 청군이 진군하여 처들어 온다. 한양을 목표로 기병을 이용하여 진격을 한다. 조선은 산성을 방비하면 진군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잘못 판단한다. 하지만 청은 성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진격하였고 불과 5일만에 도착한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조선 왕의 항복 문서였다. 청은 왕이 있는 남한 산성을 포위한다. 사실 왕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한 발 늦어 버렸다. 양화진이 이미 차단 되어버린 것이다. 왕족은 먼저 피난을 보냈다. 당시 강화도 책임을 맡은 사람은 영의정 김류의 아들 김경징이었다. 하지만 그는 돈을 준 사람의 편의를 봐주면서 먼저 배에 실어 주었고 소현 세자 강빈을 추위에 떨게 하면서 대기 시켰고 자신의 재물과 가솔을 배에 실어 나르는데 급급했다. 이를 본 강빈은 "경징아! 경징아! 네가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한 발 늦은 인조는 차선책으로 남한 산성으로 들어 간다. 청 태종이 친히 조선에 와서 진두 지휘한다. 청은 왕이 나와서 항복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한다. 주화냐 척화냐 남한 산성의 신하들은 갑론을박 한다. 최명길은 주화론, 김상헌은 척화론을 외친다. 인조는 너무나 힘들었다. 식량도 거의 떨어졌고, 구원군도 나타나지 않았다. 왕족들이 피난을 간 강화도 역시 이미 함락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인조는 결국 최명길의 손을 든다. 항복을 결정한다.
청은 왕이 직접 나올 것을 명하여 인조는 왕으로서 남문으로 나올 수도 없었다. 결국 죄인의 신분으로 서문으로 나왔고, 곤룡포도 입지 못하게 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오랑캐의 항복 의식(삼배구고두례)을 수행한다. 청나라와 조선은 이제 군신의 관계가 된다. 청은 왕족을 인질로 끌고 간다.
환향년이라는 욕의 유래: 청나라로 납치 된 포로 중 조선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비하하는 말로 환향녀라고 했다. 자기 여자를 지키지도 못한 사대부들이 환향년이라고 욕한 것이다. 정말 염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욕은 자제해야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백성들이 의병으로 싸웠다. 하지만 너무나 신임을 상실한 조선 지도부 때문에 병자호란 때는 백성들이 피난을 처음으로 갔다고 한다. 백성들의 마음도 이제는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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