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현장/조선 왕조 실록

조선왕조실록- 고려의 오물을 덮는 아름다운 비단 조선 위에 재를 뿌린 이방원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출현으로 사실상 개혁당이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학업에 정진하여 대과에 급제 한다.  정도전이 수학했던 이색 학당에는 쟁쟁한 동문들이 많았다.  특히 정몽주가 두각이었고, 권근, 윤소정 등이 동문이었다. 

 

 신돈: 공민왕의 개혁정치 파트너였다.  굉장히 파격적인 인사였다.  권문세족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였기에,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다.  학계에서 조차도 새로운 인물이 없었다.  공민왕은 외로웠다.  신진 사대부나 최영 같은 무장세력이 아직 영글지 않았던 때였다. 이럴때 신돈이 공민왕의 눈에 띈 것이다.  신돈은 고려 말에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돈은 부정축재와 방탕으로 빠지게 된다.  결국 공민왕에 의해 유폐 후 처형되었다.  신돈이 자기 관리를 잘 했다면 고려 부흥의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의 지속적인 파트너가 될 수 없었다.  공민왕의 태도 역시 조금 모호했다.  제대로 신돈과 함께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고, 모든 힘을 그에게 주고 공민왕은 물러나 있었다.  만일 신돈이 훌륭했다면 역성혁명이 아닌 다른 개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고려는 너무나 낡았다.  옷을 갈아 입을 필요가 있었다.

 

 공민왕의 죽음: 고려 왕조의 쇠락한 위신이 공민왕의 죽음으로 명확해졌다.    공민왕의 폐륜이 낳은 우발적 사건이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공민왕은 많은 상심을 겪었다. 고려의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많은 노고를 겪었고, 마지막에는 신돈을 통해 개혁을 이루려 했으나 실패하자 모든 것을 다 놔 버렸다.  아이를 낳다 죽은 노국 공주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며 정치를 소홀히 했다.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산다. 반야와 신돈 사이의 자식이라는 논란이 일어 나게 된것이다. 훗날 역성혁명의 큰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정도전:  부모 삼년상을 치르면서 유학 서적을 정독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 당시 정몽주가 보내준 맹자를 탐독했다고 한다.  맹자의 생각은 혁명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정몽주는 선배로서 정도전에게 멘토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정몽주의 죽음은 정도전에게도 큰 손실이었다.

역성혁명 과업에 동참할 학문적 동지가 부족했던 것도 정도전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정몽주가 함께 짐을 져주었다면 정도전으로서는 큰 시름을 덜 수 있었을 터였다.  이인임이 원과 관계를 다시 다지려는 정책에 대해 정도전이 반대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인임은 심지어 정도전으로 하여금 원의 사신을 영접하게 한다.  정도전은 항명하였다는 이유로 나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정도전은 십 년 동안 정치 활동을 금지 당했다. 유배에서 돌아와도 정계에 재 진출 할 수 없었다.

유배지에서 정도전은 민초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면서 맹자의 실천적 이념과 애민 정신을 기르게 된다.   당시의 기층 민중의 삶을 구구절절이 공유하게 된다.   정도전은 후에 이성계와 연합하여 역성혁명을 추진한다.

 





 정몽주가 가진 명분적 힘과 이성계가 가진 물리적 힘: 이성계의 낙마 사건은 정몽주 진영에 큰 반격의 호기를 제공한다.  간관 김진영을 내걸고 정도전을 탄핵한다.  정도전은 미천한 출신이기 때문에 죽이라고 상소한다.  정도전 일파를 귀양 보낸다.

마지막 순간에 공양왕은 친위 쿠데타를 하기에는 군사력이 부족하였기에 정도전에 대한 처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로지 정몽주의 치밀한 기획력과 추진력 뿐이고 실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사실 역성혁명을 저지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정몽주가 제공한 것이었지만 공양왕이 겁이 너무 많았다.  절체절명 정도전 진영의 위기 순간에 이방원이 절묘하게 등장한다.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의 오른 손은 정도전, 남온, 조준 등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정몽주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최상책은 그들을 제거하여 이성계를 무뇌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방원은 명분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방원은 철저히 권력 지향적이고 기회주의인 인물이었다.  이방원은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먼저 공격을 당한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예리한 현실 인식 능력으로 먼저 선수를 치는 인물이었다. 이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참살한다.  그도 처음에는 이성계의 허락을 받으려 했지만 이성계는 여전히 명분에 치우쳐있었다. 이성계는 모양 좋게 왕이 되려 했다.  정몽주는 이러한 허실을 활용하여 마지막 반격을 시도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는 절대적인 힘의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끌어 아름다운 모양새를 다지고 싶어했다. 사실 정몽주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계란이 바위를 깰 상황이 오게 된 것은 이방원이 보기에 역설적인 것이었다.  이방원은 가신을 시켜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힘의 역학 구도를 선명히 들어 내었고, 고려의 마지막 정치적 양심을 종식시켰다.  현실과 낭만의 잔인한 충돌이었다.    정몽주의 죽음 때문에 역성혁명의 반대 세력은 완전히 와해 되어버린다.  정몽주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제 조선 개국은 필연이었고, 이성계는 볼 성 사나운 꼴로 왕위를 찬탈해야만 했다. 이성계(태조)는 두고두고 이방원(조선의 제 3대 임금 태종)을 원망한다.   이방원의 아들 세종대왕이 부랴부랴 용비어천가를 지어 조선 개국의 당위성과 신성함을 노래하였다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