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기록의 나라이다. 조선 왕조 실록 및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이 유명하다.
중죄인 심문을 다룬 기록을 '추안급국안'이라고 한다. 오늘은 이 기록에 대해서 블로깅을 해보고 싶다.
선조 34년에서 고종 29년 까지 즉 공용기원 1601년부터 1892년까지 사이의 추국 사건 1만 2589건을 담아냈다. 조선 전기의 기록은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이 되었다.
추안급국안이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조선 후기 전체를 아우를 뿐만 아니라, 관찰사료 즉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의 한계를 보안해준다는 의미도 크겠다.
실록은 지면에 제약이 있어서 사건을 간략하게 기록하는데 그치지만 추국은 당사자 뿐만 아니라 이웃집 사람, 친족들, 상전, 노비, 등등 사건에 조금이라도 관련되어있는 사람은 전부 망라되어 있다. 이들에 대한 신문 과정은 흥미진진하여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관찰 사료가 보여주지 못하는 이면을 들여보게 해주며, 조선사람들의 생활이나 생각, 의식주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조선 민중의 삶을 과감 없이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 매우 가치 있는 사료가 되겠다.
추안급국안은 본질적으로 의금부의 기록이다. 이 글에는 초서와 이두, 한글 등이 마구 뒤 섞여 있어서 한국 고문서 번역위원들이 번역하는데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번역 기간만도 무려 10년이 걸렸다. 전통 한문으로 기록이 된 것이 아니라 , 당시 아전 들이 쓴 기록이어서 보통 한문 문장과 다른 점이 매우 많다. 개인적으로 주고 받은 편지, 반란을 모의하면서 내건 격문 등은 초서로 되어 있고, 우리 말의 음차에서 한문으로 표시하는 이두도 한문과는 다르다 심문하는 과정에서 즉시 받아 적어야 하는 관리가 미처 한문으로 문장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한글로 쓴 기록도 매우 많다. 번역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바로 이 한글 부분이었다고 한다. 국어와 국어학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해결이 안된 부분이 많아 번역문에 잘 모르겠다는 고백을 해야 했을 정도다. 자료 자체가 워낙 오래 되어서 낙장도 많고 글자도 판독하기 어려워 직접 규장각에 가서 마이크로 필름을 일일이 판독하는 일도 해야 했다. 이런 점들을 해결하면서 번역하는 과정은 매우 고단했다고 한다.
추안급국안에 기록된 대표적 사건: 추안급국안은 총 331책인데, 여기 담긴 주된 내용은 반란, 역모, 천주교 신자를 심문하는 내용 등이다. 이중 영조 때가 전체 분량의 3분의 1을 차지 할 정도로 방대하다. 영조 때의 추국은 거의 대부분 역모 사건이다. 흔히 영,정조 시대를 태평성대, 문예부흥기로 평가 하지만, 추안급국안 내용에 따르면 오히려 이때야 말로 가장 격변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영조를 옹립한 노론을 제외한 남인, 소론들은 영조를 철저히 부정한다. 영조는 모계가 무수리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고, 아버지도 숙종이 아니라 노론의 김충택이라는 그런 얘기, 몸이 약한 경종이 영조가 보낸 간장 계장을 먹고 죽었다는 경종 독살설 같은 의혹이 양반들 사이에서 사실 처럼 퍼져 있었다. 이러한 얘기들은 심문과정에서 차마 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할 말이라고 에둘러 표현되기도 하고, 어떤 죄인은 아예 대놓고 '나는 경종대왕 승하 이후로 간장계장을 먹지 않는다'라고 당당히 진술해서 영조의 진노를 사기도 한다.
이인좌의 난도 이때 일어났다. 무신년에 일어 났다 해서 무신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에 대한 기록도 많이 있다. 대대적인 양반들의 반란이었다. 보통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양반들이 조선의 임금을 부인하여 일어난 조선의 유일무이한 반란이었다.
무신난이 진압되고 난 뒤에도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아주 큰 사건으로는 무신난이 끝난 2년 뒤에 다시 대대적인 추국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남인 소론들이 궁중 안의 나인들과 궁녀들과 모의해서 영조에게 해 꼬지를 하는 저주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궁궐 밖에서 뼈가루를 들여와서 궁궐에 묻는 매흉이라는 방법과 미음이나 죽에 타서 동궁과 옹주에게 먹이는 화흉이라는 방법이 동원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사람 뼈가 동이 나서 고양이 뼈나 여우 뼈를 다시 들여 왔다고 한다. 많게는 한 섬까지 들여 오기도 했다. 이런 많은 양을 지엄한 궁에 들여 오려면 궁궐 나인들과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목적은 분명했다. 영조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자손을 낳지 못하게 하려는 저주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실록에는 창경궁 근처 땅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라고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추안급국안에는 어떤 목적으로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일을 벌였는지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이 발각된 이유는 영조가 궁궐을 거닐다가 창경궁 뜰 바닥이 심상치 않아서 파보게 했고, 이로 인해 추국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일이 발각된 것은 효장 세자가 죽고 난 뒤에 일어 난 일이다. 효장 세자는 영조 4년에 이유를 알 수 없이 시름 시름 앓다가 죽었다. 추국 과정에서 영조는 효장 세자가 화흉으로 인해서 죽었다고 확신을 갖게 된다.
뼈가루를 공급했던 중간책을 추국하면서 '왜 요즘 뼈를 다시 구하지 않느냐?' 라고 묻자, 이미 쓸데 다 써서 필요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효장세자가 죽었던 이유를 확언 할 수 없지만 사실 위생상태가 매우 불량했을 뼈 가루를 장기적으로 먹인다면 분명 면역이 약한 세자나 옹주에게 아주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철저히 규명했다.
이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한 두 페이지 이지만 국안 기록은 여섯 권이나 된다. 자신의 피붙이를 죽인 이 사건으로 인해 영조는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끝까지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남인과 소론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영조 재위 내내 역모사건이 계속 일어 난다. 이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담금질과 같은 낙형이라는 불법적인 고문을 쓰기도 하고, 역적률을 적용해서 한 가정을 몰살 시키기도 한다. 영조 31년에 가서야 정적들을 모두 제거한다. 그리고 낙형제도를 없애게 한다. 영조 이후 정조 대에는 고문이 법제화 되어서 고문의 강도가 많이 완화된다.
이처럼 조선 시대 후기와 관련하여 민중들의 생생한 속살과 정치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훌륭한 책임은 분명하다. 번역을 위해 물심양면 노력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노고에 대해 감사함을 나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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